40년 전 선보인 아우디 콰트로, 아우디의 역사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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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40년 전인 1980년 3월. 스위스에서 제50회 제네바 모터쇼가 열렸다. 그곳에서 독일의 한 자동차 브랜드가 새로운 개념의 차를 하나 선보였다. 그 브랜드의 이름은 아우디, 차의 이름은 콰트로였다. 아우디의 역사는 콰트로를 경계로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르다. 그만큼 아우디에게 콰트로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차다. 

1980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된 오리지널 아우디 콰트로(Quattro)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도 콰트로라는 모델에 관한 것이다. 자동차 역사에 관심 있는 애호가들이라면, 콰트로가 아우디의 모델 이름으로 시작해 아우디가 쓰는 네바퀴굴림 시스템을 뜻하는 브랜드가 되었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델 이름은 대문자(Q)로, 네바퀴굴림 시스템 이름은 소문자(q)로 시작한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콰트로라는 모델이 사람들에게 남긴 깊은 인상 덕분에, 아우디는 콰트로를 아예 승용차용 네바퀴굴림 시스템의 상표로 등록해 버렸다. 즉, 콰트로(Quattro)가 있었기에 콰트로(quattro)가 있을 수 있었다.

애호가들이 우어콰트로(Ur-Quattro)라는 별명으로 즐겨 부르는 오리지널 콰트로가 나오기 전까지, 아우디는 세계 자동차 업계에 그리 큰 영향력이 있는 회사나 브랜드는 아니었다. 1910년에 탄생한 이후로 부침이 끊이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제난으로 1932년에 호르히, 반더러, DKW와 합병해 탄생한 아우토 우니온이 나치 정권의 뒷받침으로 모터스포츠에서 빛을 발한 1930년대를 제외하면 말이다.

1949년에 아우토 우니온이 새롭게 둥지를 튼 잉골슈타트의 건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아우디는 한동안 간단히 말해 엉망진창이었다. 원래 근거지였던 작센 지방이 동독에 편입되면서, 전쟁 전처럼 사업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49년이 되어서야 일부 경영진이 서독 지역인 잉골슈타트에 다시 회사를 세웠고, 모터사이클과 소형 상용차, 부품을 생산하며 회생을 시작했다. 승용차 생산을 재개한 것은 1950년의 일로, DKW의 2행정 엔진 소형차 기술에 의존해야 했고 일부 모델에 네 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로고와 아우토 우니온이라는 이름을 썼을 뿐이었다.

1950년대에 걸쳐 아우토 우니온은 그럭저럭 규모를 키우며 버텼지만, 재정 여력이 부족했다. 때마침 회사 규모를 키우고 싶었던 다임러벤츠(지금의 다임러)가 나서 회사를 인수했지만, 현대적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새 모델을 개발하는 데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갔다. 결국 다임러벤츠는 5년여 만인 1964년 말에 아우토 우니온을 수출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폭스바겐에 다시 매각했다. 

1969년형 아우디 60L. 한 가지 차체에 엔진 출력을 달리한 모델이 전후 첫 독립 모델이었다

아우토 우니온은 잉골슈타트 공장에서 한창 인기있던 폭스바겐 비틀을 생산하며 다시금 재기를 노렸다. 196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우디라는 이름이 부활했는데, 브랜드가 아닌 모델 이름으로 쓰였다. DKW가 만들던 4도어 세단 차체에 다임러벤츠 시절에 개발을 시작한 4행정 4기통 엔진을 얹은 소형 세단이었다. 2차대전 이후 아우디가 4행정 엔진을 처음 쓴 이 모델은 이후 엔진 출력에 따라 60, 70, 72, 75, 슈퍼 90으로 나뉘었지만 차체는 여전히 4도어 세단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1966~67년 사이에 있었던 독일의 경기침체 여파로 자동차 업계에는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고, 폭스바겐은 야심차게 개발했던 로터리 엔진 승용차 Ro80이 엔진 내구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NSU를 1969년에 인수해 아우토 우니온과 합병시킨다. 그래서 폭스바겐 그룹 산하에 아우디 NSU 아우토 우니온이라는 긴 이름의 회사가 탄생했고, 1970년에 이르러서야 기술 개발 부서가 독립된 시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여러 브랜드를 거느리게 된 폭스바겐에게는 브랜드 운영과 체계 정리는 물론 그에 걸맞은 모델 구성도 필요했다. 

소형차 아우디 50은 폭스바겐 폴로가 되었다

아우디를 고급 브랜드로 끌어올리려는 것이 폭스바겐의 계획이었지만, 그런 작업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 그런 와중에 석유파동까지 일어나면서 1970년대 내내 아우디는 아주 단출한 라인업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1974년에 선보여 모처럼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소형차 50은 라인업 정리를 거치며 폴로라는 이름으로 폭스바겐 브랜드에 편입된 탓에, 아우디는 1972년에 선보인 소형차 80과 1968년에 나온 중형차 100을 중심으로 일부 파생 차종만 만들고 있었다. 두 차종은 비교적 새로운 기술과 높은 효율 덕분에 아우디가 석유파동의 난국을 헤쳐나가는 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포르쉐와 다임러벤츠를 거쳐 1972년에 아우디로 자리를 옮긴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아우디의 기술적 체질을 바꾸기 시작했다. 다임러벤츠 시절 구체화했던 5기통 엔진 설계를 아우디를 통해 다시 내놓았고, 전자제어 연료분사 시스템, 터보차저 등 새로운 기술을 양산차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서 DKW 시절 군용차로 개발한 뭉가와 뭉가를 현대화한 일티스의 네바퀴굴림 시스템을 2세대 아우디 80의 2도어 쿠페 차체에 결합한 것이 오리지널 콰트로다. 달리 말하면, 콰트로는 당시 아우디가 가진 모든 기술을 집대성한 차였다. 

공개를 앞두고 겨울철 주행 시험 중인 오리지널 아우디 콰트로

물론 콰트로는 승용차에 처음 쓰인 4륜구동 시스템은 아니었다. 1972년에는 후지중공업이, 1979년에는 AMC가 각각 4륜구동 시스템을 쓴 왜건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들보다 앞서 나간 업체도 있었다. 영국의 젠센이었다. 젠센은 1966년에 내놓은 FF에 처음으로 4륜구동 시스템을 썼다. 아우디보다 먼저 시도한 업체들의 기술은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기술적 한계와 비싼 값도 발목을 잡았지만, 많은 소비자가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한 이유도 컸다. 그런 흐름을 뒤집어 놓은 것이 콰트로였다.

아우디는 콰트로의 홍보를 위해 세계랠리선수권(WRC) 출전에 나섰고, 그것이 콰트로를 널리 알리는 것은 물론 승용차용 상시 네바퀴굴림 시스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 스웨덴 랠리부터 1985년 산레모 랠리에 이르기까지 아우디 스포트 팀의 콰트로 경주차는 개선을 거듭하며 WRC에서 23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아우디는 콰트로로 WRC에 출전해 1981년부터 4년간 여러 차례 우승했다

콰트로의 잇따른 WRC 우승과 더불어, 이전까지 돋보이지 않던 아우디의 브랜드 이미지도 기술력과 고성능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우디의 브랜드 슬로건 ‘기술을 통한 진보(Vorsprung durch Technik)’가 널리 알려진 것도 그 덕분이었다. 이 슬로건은 1970년대 초반에 아우디 내부에서 쓰이기 시작했지만, 브랜드 홍보를 위해 사전조사를 하던 영국 광고 에이전시가 발굴해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콰트로가 WRC에서 승승장구하던 1983년이었다. 

물론 초기 콰트로 시스템도 일반 승용차에 쓰기에는 불편한 것이었다. 세로로 배치한 엔진과 변속기 뒤에 베벨 기어식 센터 디퍼렌셜을 달아 앞뒤 차축으로 동력을 배분하고, 센터 디퍼렌셜과 리어 디퍼렌셜에 필요에 따라 잠글 수 있는 기능을 더한 구조였다. 디퍼렌셜을 언제 잠그고 풀지를 결정하는 것은 운전자의 몫이었다. 운전자가 초기에는 디퍼렌셜 잠금장치와 케이블로 연결된 레버를, 1981년부터는 센터 페시아 아래쪽에 있는 스위치를 조작하면 유압장치가 작동해 각 디퍼렌셜을 잠그고 풀었다. 물론 WRC에서 입증된 것처럼 험로에서는 구동력 전달 능력이 탁월했지만, 일반 승용차에 쓰기에는 까다롭고 불편한 기술이라는 점은 여전했다. 

초기 콰트로의 센터 디퍼렌셜. 디퍼렌셜 잠금 기능은 운전자가 직접 조절했다

실질적으로 콰트로가 승용차에 걸맞게 진화한 것은 1986년의 일이었다. 센터 디퍼렌셜을 토센(Torsen) 방식으로 바꿔 바퀴에 걸리는 힘에 따라 기계적 구조가 자동으로 구동력 배분 정도를 제한할 수 있게 되면서, 운전자가 네바퀴굴림 장치 작동에 개입하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아우디 80 콰트로에 처음 쓰인 이 기술은 기본 전후 토크 배분비율이 50:50이지만, 주행 상황에 따라 75:25~25:75까지 조절되었다. 

그리고 1986년 겨울에 핀란드 스키점프대에서 100 CS 콰트로로 촬영한 광고영상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차가 뒤로 밀리지 않도록 유도용 로프를 사용했지만, 가파른 경사로를 달려 올라가는 100 CS 콰트로의 모습은 영상 끝에 나오는 슬로건 ‘Vorsprung durch Technik’과 더불어 아우디와 콰트로를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하게 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아우디는 콰트로를 자사가 쓰는 네바퀴굴림 장치를 통칭하는 개념의 상표로 등록했고, 꾸준한 개선과 확장을 통해 발전시키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우디와 콰트로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스키 점프대 광고 영상

콰트로는 전기 구동계에도 이어지고 있다. 2018년에 선보인 이트론에서는 전기 모터 두 개를 사용한 전동 네바퀴굴림 시스템을 쓰는 양산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올해에는 제네바 모터쇼가 열릴 예정이었던 시기에 전기 모터를 앞 차축에 한 개, 뒤 차축에 두 개 달아 토크 벡터링을 구현한 고성능 S 모델용 전동 콰트로 시스템 개념을 공개하기도 했다.

40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콰트로가 등장할 즈음, 아우디가 생산한 모델은 세 종류에 불과했다. 물론 콰트로가 아우디 판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가 다 가도록 아우디의 모델 라인업은 여전히 크게 늘지 않았고, 생산 및 판매량도 크게 늘지는 않았다. 그러나 90년대에 시작된 아우디의 급격한 성장은 80년대에 콰트로가 끌어올린 브랜드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화려한 마케팅과 치장에 묻혀 가치와 중요성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아우디 브랜드 진보의 원동력은 분명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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