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Hyundai_Grandeur(HG)-1

[ 오토카 2010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현대의 신형 그랜저(HG) 출시가 초 읽기에 들어갔다. 미쓰비시 데보네어를 그대로 가져다 만든 첫 그랜저가 데뷔한 것이 1986년의 일. 햇수로 25년, 4반세기라는 긴 세월동안 상징적인 존재 역할을 톡톡이 해 내었던 현대 대표 고급차의 이름은 5세대째인 이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데뷔 후 있었던 현대의 변화와 함께 그랜저의 위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세대 모델인 뉴 그랜저가 모델 수명이 다되어갈 즈음 다이너스티 출시와 더불어 이미 현대의 최고급 모델 자리에서 밀려났고, XG의 등장은 그랜저를 뒷자리 중심의 차에서 오너 중심의 차로 입지를 바꾸어 놓았다. 4세대 그랜저인 TG가 나오면서 그런 성격은 더욱 확고해졌다.

더욱이 현대의 글로벌 전략 변화로 최상위 모델 라인업이 뒷바퀴굴림 플랫폼을 쓰기 시작하면서, 앞바퀴굴림 방식을 이어가고 있는 그랜저와 윗급인 제네시스, 에쿠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지금의 그랜저를 과거 쏘나타의 고급형 모델이었던 마르샤의 연장선 상에 있는 모델로 여기곤 한다. XG 시절부터 굳어지기 시작한 이미지를 이제는 떨쳐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너 중심의 앞바퀴굴림 대형 고급차라는 이미지 말이다.

오너 중심의 앞바퀴굴림 대형 고급차. 말은 그럴싸하지만 참 답답한 포지션이다. 이런 성격의 차가 먹혀들 수 있는 시장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적 시장지배력을 가진 우리나라가 아닌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대라는 브랜드의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라는 브랜드로 이런 성격의 차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소비자는 아직 많지 않다.

그랜저가 먹혀들 수 있는 시장은 기껏 미국과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정도다. 하지만 현대 브랜드로 잘 팔릴 수 있는 차는 아직까지 쏘나타급이 한계다. 그 윗급으로 가면 여러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시장 중 하나인 북미만 놓고 보아도, 현대와 비슷한 성격의 브랜드가 내놓는 그랜저와 비슷한 성격의 모델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언뜻 떠오르는 차라고 해 봐야 도요타 아발론, 뷰익 라크로스 정도다.

중국 시장에서도 고급차로 갈수록 브랜드의 영향력은 점점 커진다. 시장 자체가 크다는 면을 고려하면 절대적 판매량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될 수 있겠지만 경쟁 메이커들이 넋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시장적 특수성을 고려해 보수적인 메이커들조차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독일 메이커들마저 일찍부터 중형 모델의 롱 보디 버전을 만들어 대형차급 편의장비를 갖춰 판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 그랜저를 개발한 현대 내부에서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디자인과 상품성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NF와 TG에서 좁아지기 시작한 쏘나타와 그랜저의 이미지적 간극은 YF와 HG 사이에서 더욱 좁아지고 있다. 엔진 라인업과 몇몇 편의/안전장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격에서의 차이만으로 이런 간극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K7로 없었던 라인업이 새롭게 더해진 기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랜저가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에, 그리고 자동차 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다져진 사회적 시스템 때문에 내수 시장에서 그랜저 HG는 동급 베스트 셀러의 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이 아니라 다음 세대다. 기아 K7이 순식간에 만만찮은 경쟁자로 치고 올라왔고, 곧 나올 르노삼성 SM7도 잠재적인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 GM대우도 과거 베리타스와는 달리 알페온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인만큼 파상공세를 꾸준히 펼칠 것이 분명하다.

그랜저의 존재가치는 HG가 입증할 것이다. HG, 그리고 HG 이후 그랜저의 이미지를 앞으로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현대라는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만큼 중요한 결정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