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시작 – 프라모델

[ 모터트렌드 한국판 2016년 10월호 ‘꿈의 시작’ 피처 기사에 실린 제 글입니다. ]

내 나이 또래의 남자라면 대부분 어렸을 때 프라모델을 만든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손을 떼고 어느 순간부턴가 프라모델을 ‘애들이나 갖고 노는 장난감’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대학 입학 전까지는 공부 이외의 생활이 허락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뒤늦게 프라모델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내가 특이한 상황에 해당할 뿐이다. 

오히려 프라모델은 내가 다 큰 다음에 더 큰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었다. 프라모델이 내 삶에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인생의 암흑기였던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때 나는 건강 문제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던 대신 공부 압박은 크지 않았다. 덕분에 또래들보다는 취미와 관심사에 시간과 용돈을 더 투자할 수 있었다. 한창 자동차에 관심이 크던 시절이라 잡지를 읽고 그림도 그리며 자동차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른 모형 전문점에 산더미처럼 쌓인 외산 자동차 프라모델을 발견하고 모아둔 용돈을 털어 하나를 사서 조립했다. 전에 없던 즐거움이 가득한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글과 사진으로만 접했던 차를 모형으로나마 보고 가질 수 있어 정말 뿌듯했다.

요즘처럼 정밀 다이캐스트 모델이 많지 않고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사실적인 모형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이 프라모델 조립이었다. 흔히 박스아트라고 말하는, 상자에 그려진 차 그림도 좋았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을 꼼꼼히 살피며 그림 표현기법도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자동차 프라모델의 세계에 푹 빠졌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전공공부보다는 프라모델 만들기에 더 힘을 쏟았다. 생활비를 프라모델과 관련 용품을 사는 데 미리 써버려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구걸하며 생활할 때도 있었고, 동호회 전시회 때에는 사나흘 사이에 예닐곱 개의 완성품을 뽑아내기도 했다. 생각해 보자. 프라모델 조립 과정에는 접착제와 페인트가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키트 하나를 완성하고 나서 다른 키트 조립을 시작하는 식으로 작업하면 절대로 짧은 시간에 여러 개를 만들 수 없다. 여러 키트를 한꺼번에 까놓고 공정에 따라 병행 조립해야 가능한 일이다. 말 그대로 공장을 돌린 셈이다. 

4년 내내 그렇게 산 덕분에, 나는 우스운 성적으로 입학한 대학을 우스운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크게 후회하지는 않는다. 프라모델을 만들며 배운 것들이 결코 전공공부와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어서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건 글이 실린 매체는 자동차 잡지가 아니라 프라모델 잡지였다. 자동차 프라모델을 열심히 만든 덕분이었다. 그렇게 내가 글쟁이의 삶을 시작하는 발판을 마련해준 존재였기에, 프라모델은 내 인생 아이템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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