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에 영국 체셔주 크루에 있는 벤틀리 본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본사 생산 라인을 비롯해 뮬리너 스튜디오 등 여러 곳을 둘러보며 벤틀리의 이모저모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요. 늘 그렇듯 자동차 역사와 옛 차들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는 100년 넘는 벤틀리 역사의 주요 장면을 돌아볼 수 있는 벤틀리 헤리티지 개러지(Bentley Heritage Garage)를 둘러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헤리티지 개러지에는 벤틀리 헤리티지 컬렉션(Bentley Heritage Collection)이 소장하고 있는 차들 중 일부가 전시되는데요. 벤틀리 탄생 초기인 1919년부터 비교적 최근인 201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만들어진 차들 중 역사적 의미가 큰 차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전시되어 있던 차들의 사진과 간략한 이야기를 세 번에 나눠서 올립니다.
- 첫 번째 글: 벤틀리 헤리티지 개러지에서 만난 차들 (1) 크리클우드-더비 벤틀리
- 두 번째 글: 벤틀리 헤리티지 개러지에서 만난 차들 (2) 크루-비커스 벤틀리
- 세 번째 글: 벤틀리 헤리티지 개러지에서 만난 차들 (3) 폭스바겐 그룹 인수 이후 (이 글)
2001년형 아나지 레드 레이블

비커스가 롤스로이스-벤틀리를 매각하기로 결정한 뒤, 인수대상자가 결정되기 직전에 출시한 모델이 아나지(Arnage)입니다. 매각 과정에서 BMW가 초반에 적극적으로 인수 의사를 밝히는 한편 엔진과 여러 구성 요소들을 제공한 덕분에, 아나지와 형제차인 롤스로이스 실버 세라프(Silver Seraph)는 BMW V8 4.4L 엔진을 얹는 것을 전제로 개발되었죠. 실제로 처음 출시되었을 때에도 아나지와 실버 세라프의 보닛 아래에는 V8 4.4L 가솔린 트윈 터보 엔진과 ZF제 5단 자동변속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최종 인수자로 결정된 곳은 더 큰 인수금액을 제시한 폭스바겐 그룹이었습니다. BMW는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롤스로이스에 관한 여러 권리를 자동차 업체가 아니라 별개의 회사였던 항공기 엔진 업체인 롤스로이스 홀딩즈가 갖고 있었던 탓에 실질적으로 건질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BMW와 폭스바겐 사이에는 분쟁이 생겼는데요, 결국 BMW는 롤스로이스 브랜드 이름과 로고 사용권을 얻는 선에서 합의하고 마무리됩니다. 차의 설계, 생산 시설 등 많은 자산은 폭스바겐 그룹이 가지면서, BMW가 독자적으로 롤스로이스 차를 개발하고 생산할 공장을 마련하기 전까지 롤스로이스 차들은 크루 공장에서 벤틀리 차들과 함께 생산됩니다.
그런 와중에 벤틀리는 BMW에서 공급받는 엔진을 줄여 나가면서 벤틀리 팬들이 선호하는 V8 6.75L 엔진의 전통을 이어나가기로 합니다. 신세대 차에 걸맞은 성능을 낼 수 있도록 조율하는 작업과 엔진 생산은 외주를 맡겼고, BMW V8 엔진보다 크고 무거운 L 시리즈 엔진을 얹을 수 있도록 아나지의 섀시도 보강을 해야 했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모델이 아나지 레드 레이블(Arnage Red Label)입니다. 즉 롤스로이스-벤틀리와 BMW-폭스바겐의 영향이 골고루 깃든 특별한 모델인 셈이죠. 레드 레이블이 추가되면서 원래 생산되었던 BMW 엔진 기반 모델에는 그린 레이블(Green Label)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린 레이블은 생산이 중단되죠.
저로서는 구세대와 신세대, 20세기와 21세기의 중간 느낌이 물씬한 아나지의 디자인을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그와 같은 복잡하면서도 재미있는 배경이 있어서 꼭 보고 싶었던 모델이기도 합니다. 특히 젊었을 때 잡지에서 봤던 빨간색 아나지 레드 레이블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는데, 바로 그 빨간색(정식 명칭은 파이어글로우 Fireglow라고 합니다)으로 칠한 차가 전시되어 있어서 무척 반갑기도 했습니다.



2003년형 컨티넨탈 R

비커스 벤틀리 시대 초반에 개발된 섀시를 바탕으로 만든 마지막 2도어 쿠페가 벤틀리 컨티넨탈 R입니다. 1980년에 나온 벤틀리 뮬산 섀시로 만든 쿠페 버전인데요. 롤스로이스에는 같은 섀시로 만든 쿠페나 컨버터블이 없었기 때문에 벤틀리로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모델이기도 하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대 벤틀리가 만든 차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빠른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1991년에 처음 나온 컨티넨탈 R은 2003년까지 생산되었는데요. 전시된 차는 그 중에서도 거의 최종 생산 버전인 2003년형 모델입니다. 뮬리너가 꾸민 ‘파이널 시리즈 뮬리너’ 일곱 대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차라고 하네요. 아래에 나올 2003년형 아주르와 번호판을 비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2003년형 아주르

아주르는 옆에 서 있는 컨티넨탈 R의 형제차인 컨버터블로, 데뷔는 컨티넨탈 R보다 4년 남짓 늦은 1995년이었습니다. 고정식 지붕을 없애고 자동 소프트톱을 넣으면서 약해진 차체 강성을 보강하느라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요. 단순히 차체 강성만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성능이 낮아지는 것을 억제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차체는 소프트톱과 함께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에서 생산했다고 하네요.
전시된 차는 2003년에 생산된 이 세대 아주르의 최종 생산 버전입니다. 역시 뮬리너가 꾸몄고, 62대 생산된 ‘파이널 시리즈 퍼포먼스’ 중 하나입니다. 헤리티지 개러지에서 본 다음날 동승해볼 수 있었는데요. 호화로운 실내가 아주 매력적인 차였습니다. 위에 사진이 있는 컨티넨탈 R과 번호판을 비교해 보시면 재미있죠.



2010년형 아주르 T

1세대 아주르가 뮬산 섀시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면, 2006년에 데뷔한 2세대 아주르는 아나지 섀시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스타일 면에서는 원형 헤드라이트가 분리된 모습이나 차체 옆부분 처리가 2006년에 페이스리프트한 아나지와 비슷하죠. 이 무렵부터 나온 차들이 폭스바겐 그룹 시대의 상징적 앞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현대화된 섀시와 새로운 기술 덕분에 성능과 편의성 모두 이전 세대 아주르보다 훨씬 더 나아졌고요.
전시된 차는 2008년부터 생산된 2세대 아주르의 고성능 모델인 아주르 T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2010년 1월에 마지막으로 출고된 최종 생산 모델로, 출고와 함께 벤틀리 회사차로 등록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릴 위에는 플라잉 B 엠블럼을 달았는데, 왠지 이런 성격의 차에는 윙 배지가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



2010년형 브루클랜즈

옆에 서 있는 아주르 T와 형제 모델로, 같은 2도어 차체에 쿠페 보디로 만들어진 모델이 브루클랜즈(Brooklands)입니다. 이전 세대 컨티넨탈 R/T의 후속 모델인 셈이죠. 브루클랜즈는 2세대 아주르보다 늦은 2008년에 데뷔했는데요. 호화로운 고성능 모델로, 거의 주문 생산에 가깝게 만들어져 희소성이 높습니다.
전시된 차는 2년여 라는 짧은 기간 생산된 브루클랜즈 가운데에서도 2010년 1월에 마지막으로 생산된 모델입니다. 생산된 지 13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클래식카 축에도 끼지 못하지만, 스타일만큼은 웬만한 클래식 카 부럽지 않습니다. 쿠페 보디지만 소프트톱을 얹은 아주르만큼이나 매끄럽게 떨어지는 지붕선과 트렁크 부분이 세련된 분위기를 냅니다.



2010년형 뮬산(앞) / 2019년형 플라잉 스퍼

가장 최근에 단종된 벤틀리의 이전 기함 뮬산 그리고 뮬산으로부터 기함 자리를 넘겨받은 플라잉 스퍼도 벤틀리 헤리티지 컬렉션의 일부입니다. 뮬산은 아나지의 실질적 후속 모델로, 섀시도 아나지의 것을 대대적으로 손질해 만든 것입니다. 벤틀리 라인업이 온전히 폭스바겐 그룹 설계와 기술로 바뀌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죠.
전시된 차들은 각각 의미가 있습니다. 사진에서 앞쪽에 있는 뮬산은 크루 공장에서 두 번째로 생산된 차로, 섀시번호 00002입니다. 섀시번호 00001은 2009년에 페블비치에서 공개와 함께 경매로 팔려서, 사실상 이 차가 처음 생산된 모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플라잉 스퍼는 2019년에 크루에서 생산 라인을 빠져나온 3세대 플라잉 스퍼의 첫 양산 모델입니다. 앞에 있는 뮬산과는 출생시기가 10년 정도 차이가 나는, 지금 판매되고 있는 플라잉 스퍼와 벤틀리 헤리티지 컬렉션에 속하는 모델 가운데 가장 어린(!) 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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