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동차생활 2000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회사 업무에 치어 헉헉대고 있던 9월 초. 손목에 쥐가 나도록 컴퓨터 마우스를 휘두르고 있던 중 의외의 시승제의를 받았다. 바로 1936년형 모리스8이었다. 모리스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회사이고, 게다가 36년형 모델이면 칠순 넘으신 우리 큰아버님이 소학교 다니시던 시절의 차다. 진짜 클래식카를 타본다는 기대감과 함께 `도대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하는 부담감이 시소를 타기 시작했다.
‘차는 제대로 움직여 줄까, 요즘 차들도 조금 오래된 것들은 길바닥에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한데 말야. 원고 쓰려면 차에 대해서 사전조사도 많이 해야 할텐데 어디서 그런 자료를 구하나? 에이,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니 타보고 나서 생각하자.’
이렇게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승을 하게 되었다.
시승차는 영국에서 태어났으니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우리나라까지 들어오는데 64년이 걸린 셈이다. 영국서 같은 시리즈의 상태 좋은 2도어 컨버터블이 약 7천 파운드에 거래되고 있으니 더 많이 생산된 세단형은 우리 돈으로 1천만 원을 호가할 것이다. 뉴질랜드와 호주, 우리나라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오너가 뉴질랜드에서 구입, 들여온 것이다. 뉴질랜드는 생각보다 순수 영국인들의 비중이 높아 클래식한 영국차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고 한다.
모리스는 우리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진 회사는 아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엄밀히 말하면 로버라는 브랜드의 이미지 한구석에 작게 숨어있는 회사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모리스는 오스틴과 함께 영국시장을 주름잡는 양대산맥으로 자리잡고 있던 든든한 회사였다. 모리스8은 오스틴7과 경쟁하는 모리스의 간판차였다. 1935년 처음으로 등장해 3년 동안 22만 대가 팔린 베스트셀러 카이기도 했고, 세 번의 모델 체인지를 거쳐 2차대전이 끝난 뒤인 1948년까지 생산된 장수차종이기도 했다.
시승차는 1936년에 나온 시리즈 I. 처음 시승차를 만나 천천히 살피다 앞 유리창 한쪽 구석에서 발견한, 판매상이 써 붙인 듯한 쪽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1937년부터 나온 시리즈 II와는 보다 고전적인 라디에이터 그릴로 구분이 된다. 오래된 흑백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차를 직접 대면하게 되니 기분이 아리송했다. 게다가 폭삭 늙어 주저앉기 직전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제법 자세를 갖추고 서 있는 것이 그럴싸해 보였다.
덧칠을 여러 번 한 듯 두터운 차체 표면은 광택은 없지만 상당히 깨끗하다. 부가티를 연상케 하는 블랙과 레드의 투톤 컬러는 오리지널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모르긴 해도 리스토어(복원) 작업을 거치면서 새로운 주인이 멋스럽게 손본 것이 아닐까? 어쨌든 차의 고풍스러운 멋을 더해주는 ‘나이스 체인지’다. 지름이 큰 메쉬 휠에 고색 창연한 타이어는 좁고 키 큰 차체에 잘 어울린다. 작은 차체에 살아있는 펜더의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은 클래식카의 표본이다. 요즘의 도로법규에 맞게 깜박이는 앞뒤에 둥근 램프로 추가되어 있다. 옛날식 그대로라면 B필러에 숨겨져 있는 반사판이 휙 튀어나왔다가 들어갈텐데….
얇은 철판을 접어 올리듯 보네트를 열면 엔진룸 아래 낮게 깔려있는 작고 파란 실린더 블록이 눈에 뜨인다. 옛 방식으로 구성해 위아래로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4기통 918cc 사이드 밸브 엔진은 고등학교 공업시간에 배웠던 엔진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들만 달랑 갖추고 있다. 스쿠터의 머플러를 연상시키는 에어클리너가 독특하고, 그 아래 실린더 헤드에는 바로 스파크 플러그가 꽂혀있다. 그 위로 배전기, 점화코일, 연료펌프가 자리잡고 있고, 운전석쪽 격벽에는 배터리와 함께 공구함이 마련되어 있다. 몇몇 소모성 부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원래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보디는 도어가 2개인 세단형이다. 영국식으로 얘기하면 설룬(saloon)이라고 하는, 운전석과 승객석이 통해 있는 2박스형 모델이다. 활짝 열리는 도어는 B필러 아래에 경첩이 달려 있어 뒤쪽으로 열리게 되어있다. 약간 뻑뻑하게 열리기는 하지만 뒤 차체에 닿을 정도로 180도 활짝 열린다. 도어의 잠금장치는 재미있게도 집안의 방문고리와 비슷한 방식이다.
도어를 열고 실내를 들여다보면 외부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인다. 앞쪽으로 좁아지는 차체 형태 때문에 실내는 앞이 더 비좁다. 밖에서 볼 때는 느끼기 힘들었는데, 운전석에 들어앉으니 앞쪽이 좁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시트는 오래되어 비닐 커버를 씌워놓았지만 그것도 찢어져 벌어진 사이로 원래의 시트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실내 곳곳에서는 수공품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대시보드를 가로지르는 나무판이나 나사로 조여놓은 B필러 내장재하며….
앞 유리는 앞쪽 위로 젖혀 올릴 수 있게 되어있다. 에어컨은 상상하기 힘든 시대의 차이니 환기를 위한 최고의 장치가 아니었을까? 운전석쪽 유리창 윗부분에는 와이퍼도 붙어있다. 간간이 보이는 전기장치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앞 유리 위의 양쪽 구석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 500원짜리 동전만한 백미러가 달려 있다. 운전석 이마 앞에는 베니어판(?)으로 만든 선바이저도 달려 있다. 지름이 크고 고풍스런 3스포크 핸들은 철제 림을 가죽으로 감싼 것이다. 유격이 크지만 상당히 무겁다.
대시보드 가운데에는 계기들이 몰려 있다. 요즘 차에도 기본적으로 달려 있는 속도계, 오일계, 전압계, 연료계가 약간은 어수선하게 달려 있고, 스타트 레버를 비롯한 몇 개의 레버, 그리고 전기 스위치와 몇 개의 램프가 전부인 단출한 구성이다. 속도계는 시속 70km까지 표시되어 있지만 30km에 빨간 눈금이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현대적인 자동차들이 갖추고 있는 기본적인 장비들이 이미 이 시대의 차에 모두 달려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계기판 양쪽으로는 글러브 박스가 열려 있다.창문은 크랭크식으로 열게 되어 있는데, 뒤쪽 유리창도 거의 다 내려간다. 뒷유리는 조수석 도어 위에 자리잡은 레버를 밀면 차양이 올라간다. 요즘에야 전동식으로 처리할 만한 물건이지만 이 차는 도르래로 연결된 줄이 차양 끝을 잡아당겨 올라가는 진짜 수동식이다.
생각보다 뒷좌석에 오르내리기는 어렵지 않다. 아무런 고정장치가 없는 조수석을 그냥 앞으로 밀어젖히고 뒷자리에 엉덩이를 밀어 넣으면 된다. 안전을 이유로 사소한 기계장치들을 덧붙인 요즘 차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차체 폭이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탓에 뒷좌석 공간이 훨씬 넓어 보인다.
2박스형 차체로 트렁크 공간이 없다. 그러나 차체 뒤에 매달린 스페어 타이어 뒤쪽으로 피크닉 박스를 올릴 수 있도록 접이식 선반이 마련되어있다. 차와 세트로 구입하였다는 피크닉 박스는 옛날 유럽이나 미국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등나무로 엮은 것이다. 가죽 벨트를 풀러 뚜껑을 열자 나타나는 포크, 나이프 세트와 피크닉 접시들이 너무나도 예쁘게 모습을 드러낸다.
시동은 요즘 차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걸게 되어 있다. 계기판 아랫부분에 자리잡은 키 꽂이에 키를 꽂아 돌리면 계기판 가운데에 빨간 램프가 켜진다. 전기가 통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 옆에 자리잡고 있는 스타트 레버를 있는 힘껏 잡아당긴다. 그 상태에서 액셀러레이터를 깊숙이 차주면 `푸드등`하고 시동이 걸린다. 물론 한 번에 걸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두어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해줘야 한다. 차 앞의 라디에이터 아래에 시동 크랭크를 넣고 돌릴 수도 있다는데,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라 보통 이 방법으로 시동을 건다고 한다.
우렁차고 힘있는 엔진소리는 차가 스스로 살아있음을 과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행을 위해 함께 나갔던 기자들도 모두 놀랄 정도였다. 60년 넘는 세월을 버텨온 차로서 이 정도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다. 해외에서 클래식카 경매를 할 때도 구르는 차와 구르지 않는 차의 값 차이는 엄청나다. 자동차는 제대로 구를 때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오가는 차들이 별로 없는 올림픽공원 안을 달려보기로 했다. 살살 클러치에서 발을 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엔진소리도 상쾌하고, 액셀러레이터를 움직이는 대로 슬슬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나이든 차답지 않게 자연스럽다. 노인네 닦달하는 것 같아 살살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솔리드 액슬에 판 스프링으로 되어있는 서스펜션 덕분에 큰 요철에서는 충격이 컸다. 하지만 잔 진동에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제법 부드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쉴새없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하체에서 나는 것이다. 차체의 단단함은 6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거의 변함이 없는 듯 하다.
아기 손바닥만한 페달은 앙증맞게 오밀조밀 모여있는 것이 귀엽기까지 하다. 하지만 발을 움직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기어는 3단으로 구성되어있고, 보통 1단을 넣는 자리가 후진으로 되어있다. 변속을 하려면 클러치를 확실히 밟고 기어 레버를 절도 있게 꺾어 넣어야 한다. 뻑뻑한 클러치는 있는 힘껏 걷어차 주지 않으면 기어가 ‘그르륵’ 거리며 튀어나오기 일쑤고, 쇠막대를 꺾어놓은 듯한 액셀러레이터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려다 같이 밟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앞 공간 때문에 발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다. 모리스 8은 유압으로 브레이크를 작동시키는, 당대로서는 대중차에 상상하기 힘든 혁신적인 기술이 도입된 모델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디스크 브레이크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브레이크 부스터도 없어 페달을 바닥까지 ‘꾸욱’ 밟아주어야 한다. 옛날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운전을 하고 다녔을 것을 생각하면 과연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운전하는 자체가 노동이라고 생각될 만큼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운전을 했지만 그래도 마냥 정겹기만 하다. 요즘 나오는 경차들이 폭이 좁다고는 하지만 이 차만큼 타고 있는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주기는 어렵다. 클래식카에서는 여러 모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긴다. 기계가 차를 만들었다는 느낌보다 사람이 차를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렇게 사람냄새가 많이 나는 기계를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시절에는 적어도 돈에 앞서 사람을 생각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가장 크게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사무실로 돌아와 같이 일하는 후배에게 ‘정말 멋진 클래식카를 탔다’고 자랑하니 녀석은 ‘캥!’하고 코방귀만 뀌고 만다.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하다. 요즘 같은 세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낡아빠진 클래식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머쓱함을 풀어본다. ‘종로 바닥에 모인 젊은 사람들이 다 수다떨며 영화 보러만 다니는 건 아니잖아? 인사동에서 고풍스런 멋을 즐기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게재된 글과 시승한 차 사진은 카라이프넷을 방문하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