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GM대우 A/S사업부 사내보 ‘고객사랑’에 실린 글입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여파는 전세계를 휩쓸고 독일에도 상륙했다. 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던 독일 경제는 다시 주저앉았고, 기업 도산과 실업자 증가 등이 줄을 이으며 사회가 불안해졌다. 이 틈을 타 경제재건을 약속한 나치당과 총수 히틀러가 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1933년 독일의 권력을 휘어잡았다. 히틀러는 경제계, 군부와 외교적인 뒷받침을 통해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고,군비를 증강하여 독일의 국제적인 입지를 높임으로써 국민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

히틀러는 이처럼 경제를 일으키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자동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포드 모델 T가 보여준 대량생산체제의 위력에 크게 감동받았고, 자동차를 축으로 하는 규모의 경제가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자동차와 관련 산업에 대해 국가주도로 계획적인 발전을 꾀한 목적에 대해서는역사가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를 철저히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세계 첫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아우토반(Autobahn)의 건설과‘딱정벌레 차’로 알려진 폭스바겐 비틀(Beetle)의 개발이다.

Kaefer 1300 (1965)

아우토반은 ‘자동차 철도’(Auto+bahn)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과 화물의 수송을 자동차를 통해 철도처럼 막힘없이 하려는 목적으로 계획되었고, 대규모 도로 건설을 통해 고용증대와 경기활성화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히틀러는 일반 노동자들이 살 수 있는 자동차, 이른바 국민차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포드 모델 T가 그랬듯이 평범한 공장 노동자들이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면 그만큼 경제성장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이 증명되고, 그렇게 되면 노동자층의 나치당에 대한 지지는 한층 두터워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나치의 전쟁수행에 밑바탕이 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히틀러는 자신이 직접 나서 국민차의 규격을 정했다. 기본적으로 어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타고 아우토반을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고, 값은 당시 소형 모터사이클 값에 해당하는 1,000 제국마르크 이하여야 했다. 당시 독일 노동자의 평균 주급이 32 제국마르크였으니, 열심히 저축하면 1년 내에라도 이 차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런 자동차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 나치 정권은 차를 설계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자동차 설계자들이 유대인이거나 비 독일 혈통이라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결국 나치가 찾는 ‘독일 혈통의 독립된 자동차 개발자’라는 조건에 맞는 사람으로 선택된 것은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였다.

Kaefer 1500 (1966)

포르쉐는 국민차에 대한 아이디어를 오래 전부터 갖고 있으면서 여러 자동차 회사에 제안하기도 했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은 경력이 있었다. 히틀러는 이 점을 특히 높이 평가해 포르쉐를 전폭적으로 후원했고, 나치의 후원에 힘을 얻은 포르쉐는 국민차의 실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 히틀러가 제시한 국민차의 조건들은 매우 추상적이었기 때문에, 포르쉐는 자신이 생각하는 국민차의 필수조건들, 즉 작은 크기와 싼 값은 물론이고 연료소비를 줄일 수 있는 유선형 차체와 함께 간단하고 수리하기 쉬운 엔진과 구조, 만들기 쉬운 차체 등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포르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기보다, 당시 기술자들이 생각하던 자동차 설계의 흐름과 개념을 종합해 자신의 방법으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국민차의 개발이 진행되자, 히틀러는 1935년 베를린에서 열린 자동차 박람회 개막식에서 국민차 계획의 청사진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어느 자동차 회사도 이 차를 생산하려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치당은 국민차 회사를 직접 설립하고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차의 이름은 나치 산하단체의 문화 선전조직인 ‘기쁨의 힘’(Kraft durch Freude)에서 머릿글자를 따와 ‘KdF 바겐’이라고 정했다.

VW-2387.tif

아울러 나치당은 1938년부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차를 살 수 있는 저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나치당은 KdF 바겐을 현찰을 주고 살 수 없도록 하는 대신, 매주 소비조합을 통해 특별 우표를 구입해 KdF 바겐 값만큼 우표를 모으면 차를 인도받을 수 있도록 했다.이 저축 프로그램은 33만6,000여 명이 가입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돈으로 나치당은 1939년 지금의 폭스바겐 본사가 있는 볼프스부르크(Wolfsburg)에 KdF 바겐 공장을 지었다. 그러나 적금을 붓는 심정으로 차곡차곡 우표를 모아나가던 독일 노동자 가운데 KdF 바겐을 손에 넣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KdF 바겐 구입을 위해 모은 돈은 고스란히 전쟁비용으로 쓰였고, KdF 바겐을 위해 세워진 공장에서는 전쟁에 쓰일 군용차가 만들어졌다.

히틀러가 꿈꾸었던 국민차 KdF 바겐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독일이 아닌 영국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KdF 바겐의 공장이 있던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군은 당장 쓸 새차가 필요했지만 영국 본토에서 직접 차를 가져오는 것은 시간과 비용 면에서 무리였다. 그래서 이미 개발되어 있던 KdF 바겐을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생산해 필요한 차를 충당하기로 결정했다.이렇게 해서 원래 예정되었던 시기보다 7년이나 흐른 1946년이 되어서야 KdF 바겐은‘폭스바겐’(Volkswagen)이라는 회사를 통해 타입 1(Type 1)이라는 이름으로 본격 생산되기 시작했다.

1981-Volkswagen_Beetle-1

사실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타입 1은 그다지 뛰어난 차는 아니었지만, 원래 포르쉐가 설계했던 의도대로 합리적이면서도 튼튼한 차로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독일에서 타입1을 써보고 만족한 영국군 중 몇몇이 영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간 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1948년, 하인리히 노르드호프(Heinrich Nordhoff)가 새로운 경영자로 취임하면서 폭스바겐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해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품질과 성능향상에 힘입어 타입 1은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나라에서는 서민의 발로, 미국과 같은 자동차 선진국에서는 ‘값 싸고 믿을 수 있는 탈것’으로 애용되었다. 세계적인 인기에 힘입어 타입 1은 생산이 시작된 지 10여년 만인 1955년에 100만 대 생산을 넘어섰고, 덕분에 폭스바겐과 독일 경제는 되살아날 수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등 광고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광고 캠페인에 힘입어 많은 소비자에게 사랑받았고, 딱정벌레를 닮은 모양 덕분에 ‘비틀’(Beetle)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안전과 환경규제 때문에 본고장 독일에서는 1978년에 생산이 중단되었지만, 비틀은 브라질과 멕시코 등에서 생명을 이어나가 2003년 마지막 차가 나올 때까지 약 2,153만 대가 만들어졌다. 이는 한 종류의 차가 기본 설계가 바뀌지 않고 만들어진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치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입 1을 비틀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폭스바겐은 완전히 다른 차 ‘뉴 비틀’(New Beetle)이 나올 때까지 비틀을 차의 공식적인 이름으로 쓴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