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옛 그림 이야기

[ 2008년 9월 인터넷 자동차 커뮤니티 테스트드라이브(testdrive.or.kr)에 올린 글입니다 ]

테드의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꾸준히 권규혁님의 만화와 그림을 보며 즐겁고 흐뭇해 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그림을 그리시는 과정에 대한 게시물을 보면서 예전 생각이 나서 권규혁 님과도 관련이 있는(?) 옛날 이야기와 함께 제 그림도 함께 올려봅니다.

월간 ‘자동차생활’에서의 3년 반 동안 수많은 기사들을 썼지만, 그 가운데 유난히 애착이 갔던 것 중 하나가 ‘류청희 기자의 자동차 만담(漫談)’이었습니다. 대부분 잡지기사에는 타이틀 아래에 기자 이름이 들어가는데, 꼭지 이름에 기자 이름이 올라가는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다른 잡지도 그렇겠지만, ‘자동차생활’은 잡지에서 특정한 기자가 돌출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동차 만담’은 그런 틀을 깰 수 있는 시도였고, 다행히 데스크에서도 좋게 보아주셔서 지금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가 아니라면 ‘만담’이라는 말에서 옛날 장소팔, 고춘자씨가 무대에 올라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것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처음 꼭지를 기획할 때 ‘만담’이라는 이름을 떠올린 것도 꼭지의 기획의도가 ‘만담’을 지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동차 만담’을 통해 자동차와 관련된 뒷 이야기들, 일반적인 지면을 통해 할 수 없었던 독설이나 비판 등을 질펀하게 풀어놓고자 했던 것이죠. 다만 그냥 글로만 풀어놓으면 여느 컬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림 또는 만화를 곁들여 꼭지의 캐주얼한 분위기를 키우자는 것이 기본방침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시도를 제가 처음 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자동차 전문지 ‘Car Graphic’을 비롯해, 적지 않은 외국 자동차 전문지에도 비슷한 개념의 꼭지들이 있었고, ‘자동차생활’을 거슬러 올라가도 회사 고문과 마찬가지였던 조경철 박사님이 간간이 시승기에 삽화를 그려넣으셨던(알려진 바대로 조박사님은 연세대 화우회 회원이셨습니다) 역사도 있었습니다. 다만 꼭지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을 조금 더 키우고 싶었고(시각적으로), 옛날부터 그려오던 그림 스타일이 만화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차별화된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만담’의 첫 글자인 ‘만'(漫)자는 ‘만화'(漫畵)에도 쓰이는 것이어서, ‘만담’은 그렇게 꼭지의 의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꼭지를 기획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권규혁 님이었습니다. 이전부터 권규혁 님 특유의 만화체 그림을 지면과 인터넷을 통해 접하면서 무척 동질감과 공감을 느껴왔습니다. 그림의 접근과 표현방식에서 저와 비슷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기사 기획 때 조언을 듣거나 상의를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칫 어설플 수도 있었던 기획을 밀어부칠 수 있었던 데에는 권규혁 님의 그림을 통해 자신감과 희망을 얻은 것이 분명 큰 역할을 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자동차생활’에서 발을 빼고 난 이후 같은 개념의 꼭지를 권규혁 님이 이어받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꼭지 성격과 표현을 이어받는 데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야심차게 시작한 꼭지였지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글이야 글쟁이로써 어떻게든 쓸 수 있었지만, 그림은 얘기가 좀 달랐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만화가가 꿈이었고 대학교 때까지 만화에서 손을 놓지 않으려 애쓰긴 했지만, 만화 그리기에서 손을 뗀 지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던 것이죠. 지면에 올라갈 그림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 지에 대한 고민은 둘째 치고, ‘자동차생활’의 명성에 손색 없을 완성도 있는 그림을 당장 뽑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한 달 내내 야근을 해도 모자랄 만큼 맡은 기사 분량이 많았던 탓에, 그림에 할애할 시간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만담’에 올라가는 그림은 모든 기사를 다 끝낸 뒤, 최종적으로 교정을 보는 시간 동안 그리게 되었습니다. 기사를 빨리 쓸 수록 그림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졌습니다. 그래도 시간적 여유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의도했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은 포기해야 했고, 쫓기는 시간 때문에 나중에는 배경도 없이 글의 소재가 된 차만 덜렁 그려넣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두 고려해 첫 두 달 동안만 기본 그림을 종이 위에 그리고 그것을 스캔 받아 포토샵에서 채색을 했을 뿐, 나머지 기간 동안은 모든 작업을 컴퓨터로 처리했습니다. 작업에는 2000년 ‘자동차생활’의 ‘스쿱’ 란에 실릴 사진 편집작업을 위해 구입했던 태블릿이 큰 도움을 주었구요. 다행히 회가 거듭할 수록 그림 스타일은 원래 생각했던 방향으로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는데, 원래 기획했던 1년 간의 연재 기간 가운데 절반 쯤 지나고 나서야 원하는 스타일의 그림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자동차생활’을 그만 두고도 한동안 계속되었던 연재의 그림은 솔직히 많이 창피스럽습니다. 새로 옮긴 회사 일이 너무 바빴던 탓에 ‘자동차생활’에 있었을 때보다 그림에 투자할 시간이 더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저는 차의 형태는 만화적으로 과장시키면서 디테일은 최대한 살리는 쪽의 그림을 지향했습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던 시절에도 사실감 있게 그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과장하지 않으면 어색해 보이는 그림이 되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처음부터 과장시키는 방법이 제 그림의 색깔로 굳어졌죠. 그래서 ‘만담’에서는 이런 그림 스타일을 최대한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실차 사진을 부분적으로 과장시켜 약간 웃기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변형은 차체를 위 아래로 늘려 땅딸막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차체를 위 아래로만 늘리면 어색해지기 때문에, 그린하우스(지붕을 포함해 유리창으로 둘러진 탑승공간 윗부분) 부분을 조금 더 키우고 헤드램프나 테일램프, 사이드 미러 등을 적당히 비례에 맞춰 더 변형시킵니다. 그리고 바퀴를 실제보다 더 크게 키웁니다. 이렇게 하면 지나치게 만화같지 않은 사실적이면서도 (주관적인 기준으로는)재미있는 양감을 갖게 됩니다.

물론 실차 사진을 이렇게 꾸며 놓으면 2차원의 한계 때문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지만, 어차피 만화 양식을 따라 라인부터 다시 그려야 하므로 밑그림으로 쓰기에는 충분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밑그림에서부터 그림 작업은 시작됩니다. 작업도구는 사진편집 소프트웨어인 포토샵을 썼습니다. 사실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좋은 프로그램도 있지만, 아쉽게도 이 프로그램은 ‘손맛’을 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고 제가 제대로 활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포토샵은 수 년 동안 꾸준히 써 와 손에 익었기 때문에 시간은 적지 않게 걸려도 원하는 표현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죠. 단, 작업은 인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림은 인쇄해상도를 고려해 모니터 해상도보다 몇 배 더 큰 크기로 그려야 합니다. 당연히 단순화한 만화풍 그림이지만 세부에 신경을 써야 하고,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밖에 없습니다.

채색도 처음에는 사실적으로 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 보았지만, 최종적으로는 애니매이션 스타일의 단순화된 음영처리가 가장 그림 분위기와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신 조금 더 사실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그림자와 하이라이트 처리가 3~5단계 정도인 애니메이션보다는 더 깊이를 주어 7~9단계 정도의 음영구분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부분별로 표현하기 위해 따로 작업하다 보면 포토샵 파일의 레이어는 쉽게 20~30개로 늘어납니다. 수시로 밑그림과 비교해 가며 모든 작업을 마치는 데에는 밑그림 작업시간을 빼고도 짧게는 6시간, 길게는 10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줄기차게 야근을 하고 마감을 앞둔 밤샘이 이어진 끝에 6~10시간 집중해 작업하고 나면 정신도 몸도 완전히 탈진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두대씩의 차를 그렸으니 ‘자동차 만담’에 실렸던 차를 모두 합치면 20대가 조금 안됩니다. 애초에 권규혁 님처럼 그림으로 달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달력에 올리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의 그림들이 많아 결국은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또 다시 그림에는 손도 대지 못하는 환경이 되어버렸지만, 언젠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담’에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도, 글도 꾸준히 업그레이드 해야겠지만 말이죠.

이어지는 그림은 ‘자동차생활’ 2007년 8월호에 실었던 메르세데스 벤츠 SL500(R129) 그림의 제작단계입니다.

1. 첫 단계로 원본 사진. 변형을 한 뒤에도 적당히 존재감이 느껴지는 각도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부터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2. 사진에서 차만 골라내어 ‘funky’하게 변형시킨 것. 티는 별로 나지 않지만 보기보다 많은 부분을 변형시켰습니다.

3. 밑그림을 가지고 주요 선만 뽑아낸 것. 포토샵에서 손 맛 내는 라인을 뽑아내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립니다. 태블릿만으로 선을 그대로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브러시 툴과 이레이저 툴을 수시로 바꿔 쓰면서 깔끔한 선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과정상 이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작업이 절반쯤 끝난 느낌이 듭니다.

4. 가장 기본이 되는 차체색을 칠합니다. 원래 사진의 차는 빨간 색이지만 개인적으로 은색 벤츠를 좋아하기 때문에 은색에 가까운 회색을 골랐습니다.

5. 차체에서 어두운 부분을 3단계로 나누어 표현. 그림은 한 장이지만 각각의 단계마다 레이어가 따로 분리되어 있고, 차체 부위에 따라서도 나뉘어 있습니다.

6. 차체의 밝은 부분을 3단계로 나누어 표현. 마찬가지로 각 단계마다 레이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7. 차체와 타이어의 검은 부분을 채색. 비슷한 색끼리 레이어를 분리하다 보니 대개 타이어는 차체를 칠하고 난 뒤에 손대게 됩니다.

8. 실내와 기타 부분. 컨버터블은 실내가 노출되어 있어 이런 각도에서는 단순화할 수가 없습니다. 고정식 지붕을 갖춘 차들이 실내 처리는 훨씬 편하죠.

9. 나머지 내장재와 외부 몰딩, 라디에이터 그릴 처리. 차체 색은 회색이 너무 밋밋해 약간 푸른 빛을 내도록 손을 보았습니다. 여기까지가 80% 정도 진척된 모습입니다.

10. 헤드램프 내부 렌즈와 앞 유리의 표현. 유리는 안팎으로 가려진 느낌을 주는 요소와 드러난 느낌을 주는 요소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면 레이어 구분을 잘 해야 합니다. 알로이 휠의 디테일 업도 했는데, 단순한 디자인이기에 이 정도이지 고전적 분위기의 메시 휠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11. 완성된 그림. 헤드램프와 유리의 반사되는 부분과 차 그림자. 사인을 그려넣었습니다. 두드러진 느낌을 주기 위해 가장 외곽선은 한층 굵게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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