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오토카 2008년 11월호에 쓴 글입니다 ]

국내에 진출한 일본 메이커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안정적인 모델, 잘 팔릴만한 모델들을 먼저 들여왔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고, 미쓰비시가 그 예외에 속한다. 어지간해서는 많은 판매를 기대하기 힘든 고성능 모델, 특히 국내 일반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모델을 선두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쓰비시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상징성이 다른 어느 모델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미쓰비시라는 ‘가깝고도 먼’ 브랜드를 알리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름 아닌 랜서 에볼루션 X(텐) 이야기다.

2011 Mitsubishi Lancer Evolution MR Touring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 나아가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북미에서조차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시리즈는 스바루 임프레자 WRX 시리즈와 더불어 신화적 존재였다. 유럽차들의 독무대였던 세계 랠리 선수권(WRC)의 판도를 뒤집은 것이 이들이었고, 특히 오랫동안 일본 이외의 지역에는 팔리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비디오 게임과 인터넷의 발달에 힘입어 서구인들은 ‘변방의 괴물’ 취급했던 이 차들을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미쓰비시는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이 독특한 차를 세계적인 주목 속에서 진화시킬 수 있었다. 10세대로 진화한 랜서 에볼루션의 국내 상륙은 이런 과정들이 낳은 혜택인 셈이다.

물론 지금의 랜서 에볼루션은 과거 모델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엔진도 오랜 명성의 4G63이 아닌 미쓰비시-현대-크라이슬러의 글로벌 엔진인 4B11로 바뀌었고, 섀시도 소형차였던 옛 랜서보다 한 급 위의 것으로 바뀌었다. 바탕이 된 모델의 이름이 다른 지역에서는 랜서이지만 일본에서는 미쓰비시 간판 중형차였던 갤랑(포르티스라는 이름이 덧붙는다)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런 변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랠리 출전을 염두에 둔 별격의 고성능 모델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랜서 에볼루션을 국내에서 처음 정식으로 만나는 느낌은 분명 색다르다.

2011 Mitsubishi Lancer Evolution MR Touring

랜서 에볼루션 X는 바탕이 된 랜서와 마찬가지로 과거 미쓰비시 차들과 디자인의 차이가 뚜렷하다. 쐐기의 날카로움이 배어있는 강렬한 모습은 박력 그 자체다. 전체적인 조화가 약간 어색하기는 해도, 속도감이 살아있어 스포츠 모델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차체 크기는 국산 준중형차와 중형차의 중간 정도이고, 강조된 선과 함께 살짝 부푼 앞뒤 펜더와 풍만한 앞뒤 에어댐 등으로 팽팽한 양감이 곁들여져 당당한 분위기다.

물론 차의 강력한 느낌을 이끄는 것은 수직에 가깝게 곧추선 차체 앞쪽의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이다. 보닛 끝부분에서 범퍼 아래까지 넓게 펼쳐진 그릴은 마치 뭔가 집어삼킬 것 같은 인상으로, 안에는 미쓰비시 엠블럼과 함께 흡기 냉각용 인터쿨러도 드러나 있다. 다른 차들과 나란히 세워놓고 보면 뚜렷한 개성과 함께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그밖에도 보닛과 펜더의 공기배출구와 흡입구, 트렁크 위로 도드라진 대형 스포일러, 뒤 범퍼 아래의 디퓨저, 건메탈색 18인치 BBS 알로이 휠과 빨간색 브렘보 브레이크 캘리퍼 등 고성능 모델에 어울리는 치장도 풍부하다. 사진보다 실물의 존재감이 훨씬 강한 것은 이런 치장들이 잘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1 Mitsubishi Lancer Evolution MR Touring

날카롭지만 은은한 곡선과 곡면이 어우러진 디자인은 실내에서도 분위기를 이끈다. 수수한 느낌의 플라스틱 재질에 요란한 치장이 없는 실내에서 건조한 느낌을 덜어주는 것은 대시보드에서 도어 패널로 이어지는 피아노 블랙 장식과 곳곳에 적절히 배치된 알루미늄 느낌의 치장들이다. 특히 지름이 작은 스티어링 휠 뒤쪽에 자리잡은 마그네슘 변속 패들과 가죽, 스웨이드, 알칸타라가 뒤섞인 레카로 버킷 시트, 대충 보면 수동변속기로 착각할 듯한 트윈 클러치 SST 기어레버는 시선을 끌 뿐 아니라 스포츠 모델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사이드 미러 안쪽에 달린 알루미늄색 트위터 커버만이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을 줄 뿐, 단출하고 점잖은 분위기의 실내 디자인에서는 일본차답지 않은 대륙적인 냄새까지 느껴진다.

스포츠 모델이라면 응당 실용성이 어느 정도 희생되리라고 예상하게 되지만, 랜서 에볼루션 X에는 웬만한 승용차에 필요한 대부분의 장비들이 갖춰져 있다. 시트조절이 수동식이라든지, 공기조절장치가 반자동이라든지 하는 것은 이런 성격의 차에서는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오히려 앞좌석 열선기능이나 인대시 CD 체인저에 트렁크에 서브우퍼까지 더해진 록포드 포스게이트 오디오 같은 장비는 차 안의 다른 장비들에 비해 수준 높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2011 Mitsubishi Lancer Evolution GSR

실내공간은 앞좌석과 뒷좌석 모두 비교적 넉넉하다. 차 밖에서는 실감하기 어렵지만 천장이 높은 편이어서 체감공간은 어른 4명이 타기에 충분하다. 특히 차의 성격에 비해 뒷좌석 공간이 답답하지 않은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어른 3명이 함께 앉기에는 답답하겠지만, 2명이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뒷좌석에서는 평범한 가족용 세단 수준의 편의성을 기대할 수 있다. 대신 오디오 서브 우퍼는 물론 이상적 무게배분을 돕기 위해 엔진룸에 있어야 할 배터리와 워셔액 탱크까지 들어앉아있는 짐 공간은 차 크기에 비해 비좁기 그지없다. 조금은 부실해 보이는 마무리도 아쉽기는 하지만, 어차피 달려야 할 숙명을 타고난 차에서 이 정도 아쉬움은 감내해야 할 것이다.

가벼운 알루미늄 보닛을 열고 그 아래에 들어앉은 2.0L 트윈스크롤 터보 엔진을 보면 마치 양산차를 튜닝숍에서 따로 튜닝한 분위기다. 4기통 엔진인 만큼 공회전 때의 진동이나 회전감이 매끄럽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낮은 회전수에서 출력에 비해 약간 밋밋한 느낌을 살짝 스쳐 보내고 나면 엔진 회전수와 속도 모두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한다. 강력한 가속력에도 지나치게 통통 튀기지 않고 차분하게 노면을 훑어나가는 서스펜션이나 고르고 매끄럽게 제동력을 발휘하는 브렘보 브레이크 등은 차의 주행감각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준다.

2011-Mitsubishi_LanEvo_GSR-2

랜서 에볼루션 같은 희소성 있는 고성능 모델이 국내에 발붙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클러치 페달 없는 수동변속기인 트윈 클러치 SST다. 폭스바겐 골프 GTI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는 데 DSG가 수훈갑 역할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비슷한 기능의 물건이라도 나중에 나온 만큼 뭔가 더 나아진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트윈 클러치 SST는 그런 기대에 적당히 긍정적인 답변을 던진다.

트윈 클러치 SST는 스위치 하나로 운전자의 주행선호도에 따라 반응특성을 노멀, 스포트, 수퍼 스포트 모드로 선택할 수 있다. 변속 뿐 아니라 AWD의 구동력 배분, 스티어링 휠의 반응속도까지 함께 조절되기 때문에, 하드코어한 모드를 선택할수록 차는 점점 거칠어진다. 수퍼 스포트 모드는 서킷 주행에 어울리는 세팅으로, 일상적 주행 때에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편하다. 스포트 모드부터 예민해지는 가속반응과 특히 낮은 기어에서 강렬해지는 변속충격을 도심지의 교통체증 속에서 한층 과격하게 감당하는 것은 썩 달갑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나 험하게 다룬 시승차의 지나친 덜컥거림만 아니라면, 빠른 변속, 특히 아랫단으로의 재빠른 변속은 스포트 모드에서도 충분히 즐겁게 다가온다.

수동 모드에서는 회전수가 올라가도 자동으로 변속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0->시속 100km 가속 4초 언저리의 폭발적 가속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항상 오른손으로 패들을 바쁘게 조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마그네슘 소재의 차가운 패들은 스티어링 휠과 함께 움직이지 않지만, 코너를 돌면서도 쉽게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위아래로 뻗어 있다. 폭스바겐/아우디 것과 비교할만한 깔끔한 조작감도 매력적이다. 4단까지 치밀한 기어비는 5단과 6단에서 약간 느슨한 간격을 둔다. 연비를 고려한 기어비 구성으로, 고속에서의 가속이 더뎌지는 데 영향을 미치지만 차의 주무대라 할 수 있는 와인딩 코스를 누비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2011 Mitsubishi Lancer Evolution MR Touring

낮은 기어에서는 폭발적이라 할 정도로 빠르게 가속이 이루어지지만 실제보다 느리게 느껴지는 이유는 S-AWC 네바퀴굴림장치의 빠른 구동력 배분 덕분이다. 웬만해서는 운전자의 시선을 흐트러뜨릴 일 없는 안정적인 주행특성은 ASC와 S-AWC의 보이지 않는 뒷받침 덕을 크게 본다. 차체 움직임은 특히 빠른 속도로 코너를 공략할 때 액셀러레이터와 스티어링 휠 조작이 정확하게 어우러지면 최고의 안정감을 선사한다. 날카로운 느낌은 적지만 정교하고 확실하게 라인을 따라 달리는 느낌은 네바퀴굴림 차가 아니면 맛보기 힘든 것이다. 게다가 핸들링은 이전의 아우디 콰트로 모델들과 비교해도 – 새 A4나 A5가 아니라면 – 더 깔끔하고 공격적이다.

이처럼 달리기 자체만 놓고 보면 딱히 나무랄 곳 없는 실력을 발휘하지만, 10세대에 걸쳐 쌓아온 랜서 에볼루션의 명성을 생각하면 ‘하드코어 고성능 모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편하고 안정적이다. 성능에 비해 비교적 부드러운 승차감은 고속주행 때에도 편안해 좋지만, ‘이런 차로 랠리를 뛴다고?’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주행특성은 안정감 일변도다.

2011 Mitsubishi Lancer Evolution MR Touring

빨리 달리는 것만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 요즘 고성능 차들의 흐름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생각했던 랜서 에볼루션의 성격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어찌 보면 과거로부터의 흐름에 쉼표를 찍는 진화이지만, 더 많은 사람이 편하고 안전하게 고성능을 즐길 수 있게 발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랜서 에볼루션과 접점이 없는, 처음으로 랜서 에볼루션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사족이지만, 출시 전에 떠돌던 이야기보다 값이 조금 높게 책정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정식수입되는 외산차 가운데 이 값에 살 수 있는 이만한 성능의 차가 몇이나 될까? 다소 아쉬운 부분들이 있기는 해도, 랜서 에볼루션 X은 더 나은 차를 만들기 위해 애써 손보지 않을 사람이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값 대비 가치가 있다고 본다.

평점: 7.0 / 10

폭발적인 가속, 정확한 핸들링. 달리기 자체만 놓고 보면 나무랄 곳 없는 실력을 발휘하지만, ‘하드코어 고성능 모델’ 이미지와 달리 편하고 안정적이다

  • 장점: 놀라운 수준의 접지력과 안정감, 대중 브랜드 고성능 차로는 잘 갖춘 장비
  • 단점: 심심하고 지나치게 값싸 보이는 실내, 좁은 트렁크 공간, 트윈 클러치 SST의 거친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