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언스북스 DK 대백과사전 시리즈 ‘카 북’ 발행에 즈음해 2013년 5월부터 11월까지 사이언스북스 블로그에 연재한 글입니다. ]

자동차는 발전하는 과정에서 항상 새로운 기술이 시도되고 접목되어 왔습니다. 초기 자동차에서는 기계적 신뢰성과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자동차가 보급될 무렵에는 편리하게 정비하고 관리할 수 있으면서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자동차가 생활 필수품이 된 이후에는 안전성과 쾌적함을 높이기 위해, 최근에는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인 차를 만들기 위해 신기술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기술 가운데에는 순수하게 실험 삼아 쓰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소비자에게 더 매력적인 상품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선하거나 좋은 기술이라도 소비자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거나 오히려 시대에 뒤처지는 기술은 대다수 소비자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죠. 오늘은 그런 이유 때문에 소비자에게 외면을 받았거나 상업적 성공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차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자동차 세상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과연 전기차 시대가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인가’입니다. 이미 국내 자동차 회사에서도 시험적으로 제품을 내놓고 있고, 해외에서는 일반 소비자들이 구매하거나 임대할 수 있는 전기차가 여러 종류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동차 세상을 지배해 온 내연기관, 그러니까 휘발유나 경유 같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엔진으로 움직이는 차들의 배기가스 문제가 전기차에는 없죠. 그래서 전기차는 새로운 시대의 친환경 차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자동차 초기에도 전기차는 존재했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차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인 시도 가운데에 전기를 이용하는 것도 있었으니까요.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휘발유 엔진은 자동차의 여러 동력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카 북’ 10~11쪽 ‘자동차 시대의 개척자’ 항목에도 증기차와 전기차가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절을 대표하는 특징적인 차 중 하나가 ‘카 북’ 30쪽에 나와 있는 HEDAG 일렉트릭 브로엄입니다. 1905년에 만들어진 이 차는 독일에서 택시로 쓰였던 것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라우만(Louwman) 자동차 박물관 소장품입니다. 이 차를 만든 회사 이름인 HEDAG은 함부르크 전기 승합차 회사(Hamburger Elektrische Droschken AktienGesellschaft)의 약자입니다. 당시 베를린이나 함부르크 같은 독일 대도시에서는 한때 휘발유 택시를 금지했는데, 그런 제도의 틈새를 노리고 만들어져 반짝 호황을 누렸던 것이 HEDAG 일렉트릭 브로엄 같은 전기 택시였습니다.

자동차 초기에는 휘발유 엔진 자동차가 마차나 증기차 같은 다른 도로교통수단보다 지나치게 빨라서 사고 위험이 컸고, 배기가스가 전혀 걸러지지 않은 채 배출되었기 때문에 공해가 심했습니다. 변변한 머플러를 갖춘 차도 많지 않아 무척 시끄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휘발유 택시를 금지한 것은 전기차를 장려하려는 목적보다는 그저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차’를 억제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행정가들은 자동차에 쓰인 기술의 장단점을 깊이 있게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상대적으로 얌전했던 전기 택시는 그런 이유 덕분에 어느 정도 입지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HEDAG 일렉트릭 브로엄은 최고속도가 24km/h로 빠르지 않았지만 주행거리는 약 80km 정도였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주행거리는 결코 짧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기 택시는 오래지 않아 휘발유 택시에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충전시설은 넉넉하지 않았고, 당시 기술로 만들어진 배터리는 용량도 작을 뿐 아니라 신뢰성도 낮았습니다. 게다가 휘발유 엔진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운송사업자 입장에서는 유지관리비용이 적게 드는 전기차보다 휘발유 엔진 차를 선호하게 되었죠. 그래서 전기차는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190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전기차와 비슷한 운명을 맞은 것이 증기차입니다. 흔히 증기로 동력을 얻는 교통수단이라고 하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증기기관차를 떠올리게 되는데, 산업혁명 이후로 중요한 동력원이 된 증기기관은 자동차가 등장할 무렵에는 놀랄 만큼 발전을 이뤄 자동차에 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졌습니다. 그래서 몇몇 증기자동차는 휘발유 엔진 차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겉모습과 성능을 냈습니다. 그런 차를 만든 회사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미국의 스탠리 모터 캐리지(Stanley Motor Carriage)를 들 수 있습니다. ‘카 북’ 본문 첫 장인 10쪽에도 1898년에 등장한 스탠리 러너바웃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회사죠.

‘카 북’ 50쪽에 실린 스탠리 모델 735는 스탠리 모터 캐리지가 만든 여러 차 가운데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보일러를 사용한 증기차였습니다. 스탠리 증기차는 초기에는 휘발유 보일러를 썼지만, 모델 735와 같은 후기형 차에는 초기 점화 때에만 휘발유를 쓰고 일반 주행 때에는 저렴한 등유를 쓰는 보일러를 썼다고 합니다. 물론 보일러는 물을 끓여 얻은 증기로 피스톤을 움직여 바퀴를 구르게 하는 방식이었죠.

연료소비효율은 대략 등유 1갤런으로 10~12마일 정도 달릴 수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 우리가 쓰는 연비단위로 바꾸면 약 4.3~5.1km/리터 정도 됩니다. 언뜻 효율이 썩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등유 값이 휘발유의 절반 정도라고 하면 연료비 면에서는 경쟁력이 아주 처지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죠. 성능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카 북>에 나와 있는 제원대로 최고속력이 97km/h에 이르렀으니 웬만한 휘발유 차 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증기차는 근본적인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물을 끓여 힘을 얻으니 연료와 함께 수시로 물도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시절에는 연료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미국처럼 땅이 넓은 곳에서는 물을 구하기가 어려운 곳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연료만 넣으면 달릴 수 있는 휘발유 차보다 증기차가 관리하기는 더 까다로웠습니다. 시동을 거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증기 압력을 얻을 때까지 물을 끓여야 움직일 수 있었죠. 그리고 갈수록 차에 필요한 장치들이 많아지면서 보일러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보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하고, 더 간단하고, 더 저렴한 휘발유 엔진 차들이 등장한 것은 증기차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포드는 모델 T를 하루에 수 천 대씩 만들어 몇 백 달러에 팔았지만, 1년에 수 백 대밖에 만들지 못한 스탠리 모터 캐리지는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탠리 모터 캐리지는 1924년에 문을 닫고 맙니다.

한편 1900년대 전반기에 가장 부유한 자동차 고객 중 하나는 여러 나라의 왕족이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민주공화정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실질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왕정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들이 많았으니까요. 가장 값비싼 차를 사는 고객들 역시 그들이었고, 그들을 위한 호화로운 차들이 꾸준히 만들어졌습니다. 대공황 이전의 1920년대의 풍요로운 시대에는 ‘카 북’ 46~47쪽 ‘사치와 품위의 상징’에 나오는 초고급차 브랜드가 호황을 누렸죠.

그 가운데에서도 돋보이는 차가 ‘카 북’ 47쪽의 부가티 타입 41 루와얄입니다. 당대 최고급 차로 여겨지던 영국의 롤스로이스나 프랑스의 이스파노 스이자를 능가하는 차를 만들려던 부가티 창업주 에토레 부가티의 야심에서 비롯된 차로, 부가티 특유의 예술적 디자인과 기술적 완벽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차일뿐 아니라 자동차 역사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차로 손꼽힙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부가티가 이 차의 주 고객으로 염두에 두었던 사람들은 주로 왕족들이었습니다. 소유주의 부와 권위를 모두 중시했다는 뜻이죠. 길이 6.4m의 차체는 지금 팔리고 있는 가장 호화로운 차인 롤스로이스 팬텀보다도 크고 웬만한 중형 버스와 견줄 수 있는 덩치입니다. 엔진은 원래 부가티가 항공기용으로 설계했던 것으로 직렬 8기통에 배기량이 1만 2,763cc에 이릅니다. 수 십 톤의 화물을 싣는 대형 트럭용 디젤 엔진과 비슷한 수준이고, 실린더 하나의 배기량이 요즘 준중형차에 주로 쓰이는 4기통 엔진과 맞먹는 1,595cc였습니다. 엔진 길이만도 1.4m나 되었죠. 최고출력은 275~300마력 정도로 3톤이 넘는 차체를 190km/h 이상으로 달리게 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차는 1927년부터 1933년 사이에 단 여섯 대만 만들어졌습니다. 1929년에 대공황이 터지면서 이 차를 살 만한 여력을 지닌 사람들이 대부분 구매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때를 잘못 만난 거죠. 완성된 여섯 대 가운데 세 대는 만들어진 직후에 구매자를 찾지 못해 부가티 소유로 있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주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카 북’에 실린 섀시 넘버 41141의 켈너(Kellner) 코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차는 1932년에 다섯 번째로 만들어진 차로, 제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판매되지 않고 부가티 가문에서 보유하고 있다가 1950년에 미국인 레이서인 브릭스 커닝엄이 여섯 번째 루와얄인 벨린 드 보야지(Berline de Voyage)와 함께 구매한 것입니다. 이 차는 1987년에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자동차로서는 최고가인 870만 달러에 경매되어 화제가 되었고, 이후 다시 여러 차례 경매로 소유주가 바뀌며 값이 거의 두 배 가까이 치솟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타입 41 루와얄이 나온 시대에 오일머니로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쌓은 아랍 왕족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불경기가 세계를 뒤덮고 있는 요즘 같은 시기에도 가장 비싸고 호화로운 차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그들의 소장품 목록에 더해지고 있는 걸 보면, 모르긴 해도 애당초 부가티가 만들려고 했던 25대의 루와얄은 모두 세상에 태어났을 겁니다. 물론 부가티 타입 41 루와얄은 희소성 때문에 현존하는 클래식카 가운데 가장 가치가 높은 차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기도 했지만 여러 면에서 운이 없는 차도 있습니다. ‘카 북’ 109쪽에 실린 터커 48은 부가티 타입 41 루와얄 만큼은 아니지만 희소성이 크고, 나중에 다룰 드로리언 DMC12만큼은 아니지만 사람과 관련한 이야기 거리가 풍부합니다. 터커 카 코퍼레이션의 창업주 프레스톤 터커(Preston Tucker)와 터커 48의 이야기는 1988년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영화로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코폴라 감독은 시제품을 포함해 모두 51대만 만들어진 터커 48을 한 대 갖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나머지 50대 중 한 대는 영화 제작자 조지 루카스가 소유하고 있고요.

터커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 자동차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GM, 포드, 크라이슬러의 빅3의 구태의연함에 반발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차를 내가 직접 만들겠다’며 1946년부터 터커 48 세단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자동차 업계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했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간 쌓은 인맥을 활용해 새로운 개념의 차를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1948년에 모습을 드러낸 터커 48 세단은 포르쉐 911, 폭스바겐 비틀과 비슷한 뒤 엔진 뒷바퀴 굴림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엔진이 수평대향 6기통이라는 점도 그들과의 공통점이었죠.

요즘 고급차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코너링 램프도 쓰였습니다. 차 앞쪽 가운데에 놓인 헤드램프가 그것이었습니다. 특수 고무가 스프링을 대신하는 네 바퀴 독립 서스펜션은 낮게 배치한 엔진과 변속기로 낮아진 무게중심과 더불어 안정적인 승차감을 뒷받침했습니다. 차체 안쪽은 충돌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보강 프레임으로 둘렀고, 대시보드는 표면을 부드러운 소재로 감쌌습니다. 앞에 안전 강화유리를 썼다거나, 충격을 흡수하는 스티어링 구조를 쓰는 등 안전도 면에서도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이렇게 혁신적이고 훌륭한 차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차를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차가 생산되기도 전에 액세서리를 팔아 자금을 모은 것을 빌미로 미국 증권감독위원회가 터커를 고발한 것이죠. 실현 불가능한 차를 미끼로 사기를 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송은 사실은 빅3이 시장 지배력을 키우기 위해 정치적 로비를 벌인 것이었고, 재판이 이루어지는 동안 터커에 부정적인 언론까지 합세하고 자금이 끊기면서 공장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1년 여의 재판 끝에 나온 판결은 터커의 무죄였습니다. 터커 48 역시 50대를 끝으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죠. 결국 터커는 미국에서 사업을 포기하고 브라질로 건너갔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 1956년에 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누군가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면 시기하는 세력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한 것이 그의 실패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터커 48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면 아마도 자동차 안전기술은 더 일찍 더 많은 차에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자동차 디자인에 개성도 더 강해졌겠죠. 터커는 재판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미국 차가 위협을 받을 지도, 한때 적국인 나라에서 자동차나 라디오를 사들여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20년 뒤에 그의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욕심이 지나쳐 빛을 보지 못한 차들도 있습니다. 철제 또는 플라스틱 지붕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오픈카, 이른바 하드톱 컨버터블의 선구적 모델이었던 푸조 402 에클립스 데카포타블(274쪽)과 포드 페어레인 500 스카이라이너(170쪽), 피스톤 왕복 엔진의 혁신적 대안이었던 NSU 방켈 로터리 엔진(226~227쪽), 자동차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돋보인 애스턴 마틴 라곤다(252쪽)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 차와 엔진은 미숙한 기술 때문에 단명했지만 나중에 기술 발전으로 성공적으로 실용화되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지금은 일반화되어 자동차를 더욱 편리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이런 기술들이 이미 오래 전에 나와 있었던 것을 보면, 기술자의 창의력은 지금보다는 오히려 과거에 더 뛰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기술이 충분한 쓰임새를 갖출 수 있는 시기에 만들어졌다면, 쉽게 말해 때를 잘 만났다면 더 쓸모 있는 기술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