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매거진 2015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폭스바겐이 비틀 이후 시대를 준비하면서 1세대 골프의 설계를 바탕으로 만든 쿠페가 시로코였다. 바람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시로코는 합리적인 가격에 스포티한 핸들링과 스타일이 돋보여 높은 인기를 누렸다.

폭스바겐에게 1970년대 초반은 변화의 시기였다. 공랭식 뒷바퀴 굴림 설계의 비틀에 의존했던 제품과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시대 흐름에 맞춰 수랭식 앞바퀴 굴림 방식 차를 만들게 된 것이다. 대대적인 변화의 중심은 소형 해치백인 골프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폭스바겐에게는  실질적으로 비틀의 후속 모델 역할을 하게 될 골프뿐 아니라 다른 모델도 필요했다. 오랫동안 폭스바겐의 스포티카 역할을 했던 카르만 기아가 바로 그것이었다. 비틀의 하체와 구동계를 활용해 만든 카르만 기아도 비틀의 생산 중단과 함께 더는 명맥을 잇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카르만 기아가 차지한 시장을 놓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탈디자인에서 디자인하고 카르만이 생산해

골프의 디자인을 맡은 이탈디자인의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폭스바겐 이사회에 골프의 스포티한 쿠페 버전을 제안했다. 이사회는 한편으로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개발비용과 투자에 대한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시장에 나와 있던 포드 카프리, 오펠 만타, 알파 로메오 알파수드 TI 등 비슷한 크기의 스포티한 모델들이 적잖은 인기를 누리는 것을 본 폭스바겐은 골프 바탕의 쿠페가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해 생산을 결정했다.

골프 출시에 앞서 틈새 모델을 내놓음으로써 핵심 모델이 될 골프의 수준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새 쿠페의 디자인 역시 이탈디자인에게 맡겼다. 다만 생산은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카르만에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새 쿠페는 타입 53이라는 내부 명칭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완성된 폭스바겐의 첫 앞바퀴 굴림 쿠페는 골프보다 약 반 년 이른 1974년 3월에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새 차에는 시로코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전 해에 선보인 파사트가 그랬듯 바람의 이름을 응용한 것이었다. 시로코는 사하라 사막에서 지중해 방향으로 부는 뜨거운 사막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름도, 구동계도, 디자인도 완전히 달랐지만, 시로코는 개념만 놓고 보면 카르만 기아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은 차였다. 대중적인 차의 기술을 활용해 적절한 가격으로 매력적인 디자인과 스포티한 성능을 지닌 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폭스바겐은 우선 주요 설계와 구성요소를 골프와 나누어 씀으로써 개발비와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었다. 그 덕분에 4개의 좌석, 충분한 적재공간, 실용적인 해치를 지니고 일상에서 쓰기에 무리 없는 실용성을 지닌 스포티 카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골프와 더불어 주지아로의 손에서 태어난 모습은 당시 최신 유행을 보여주었다.

긴 보닛과 짧은 트렁크를 지닌 패스트백 스타일은 전통적인 쿠페의 비례를 따랐다. 함께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골프나 제타보다 지붕이 낮고 날렵하게 디자인되었으면서도 뚜렷하게 형제차의 분위기를 풍겼다. 카프리나 만타, 알파수드 등 경쟁차가 조금은 고전적인 디자인을 지닌 것과 달리, 직선 중심의 현대적 디자인은 시로코의 매력을 더했다. 출시 당시 기본 모델에는 사각형 헤드램프를, 상위 모델에는 두 쌍의 원형 헤드램프를 썼다. 생산은 카르만 기아가 생산되었던 카르만의 오스나브뤽 공장에서 이루어졌다. 

세련된 핸들링으로 호평 얻어

출시 때에는 아우디 50에서 가져온 1.1리터 50마력 엔진과 1.5리터 70마력 및 85마력 엔진을 얹었다. TS라는 트림 이름이 붙은 85마력 버전은 정지 상태에서 시속 97km까지 가속하는데  11초가 걸렸다. 길이 3.86m, 휠베이스 2.4m인 소형 쿠페에 올라가는 엔진으로서는 대단히 높은 출력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 스트럿, 뒤 토션빔 서스펜션 구성에서 비롯되는 세련된 핸들링이 좋은 평가를 얻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점차 호평과 판매가 늘자, 폭스바겐은 골프에 준하는 손질을 시로코에 꾸준히 더했다. 출력이 높은 차를 선호하는 미국도 시로코를 많이 구매한 시장 중 하나였다. 초반에 미국에는 환경규제에 맞추기 위해 70마력 버전만 판매되었고, 법규 때문에 원형 헤드램프를 쓴 모델만 공급되었다. 

1976년에는 골프에 이어 GTI 버전도 추가되었다. 보쉬 K-제트로닉 연료분사장치로 성능과 배기가스 특성을 개선한 1.6리터 110마력 엔진을 얹은 시로코 GTI 역시 골프 GTI와 마찬가지로 실용성과 성능, 합리적인 가격을 고루 충족하는 차로 호평을 얻었다.

같은 110마력 엔진을 얹었지만 꾸밈새는 고급스러운 버전인 GLI도 1976년에 나왔다. 최고속도는 시속 185km에 이르렀다. 미국에는 GTI에 1.7리터 90마력 엔진이 올라갔고, 석유파동 여파를 반영해 1.8리터 디젤 엔진도 선택할 수 있었다. 최고속도는 시속 185km. 같은 110마력 엔진을 얹은 고급스러운 버전인 GLI가 1977년에 나왔다.

대중차인 골프에 비하면 판매대수에서는 한참 뒤떨어지지만, 시로코는 동급 소형 쿠페 시장에서는 만만찮은 인기를 누렸다. 1세대 모델은 1981년까지 50만 4,153대가 판매되었다. 이후에 나온 2세대 시로코와 실질적인 후속 모델 코라도에 이르러서도 1세대 시로코만큼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시로코는 폭스바겐이 스포티 카라는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