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헤리티지 개러지에서 만난 차들 (2) 크루-비커스 벤틀리


2023년 6월에 영국 체셔주 크루에 있는 벤틀리 본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본사 생산 라인을 비롯해 뮬리너 스튜디오 등 여러 곳을 둘러보며 벤틀리의 이모저모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요. 늘 그렇듯 자동차 역사와 옛 차들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는 100년 넘는 벤틀리 역사의 주요 장면을 돌아볼 수 있는 벤틀리 헤리티지 개러지(Bentley Heritage Garage)를 둘러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헤리티지 개러지에는 벤틀리 헤리티지 컬렉션(Bentley Heritage Collection)이 소장하고 있는 차들 중 일부가 전시되는데요. 벤틀리 탄생 초기인 1919년부터 비교적 최근인 201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만들어진 차들 중 역사적 의미가 큰 차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전시되어 있던 차들의 사진과 간략한 이야기를 세 번에 나눠서 올립니다.


1949년형 마크 VI

1949년형 벤틀리 마크 VI

벤틀리 생산이 1946년에 크루로 옮겨진 뒤 생산된 첫 모델이 마크 VI입니다. 원래 크루 공장은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롤스로이스가 항공기용 엔진 생산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시설인데요. 전쟁이 끝난 뒤에 원래 롤스로이스 공장이 있던 더비 공장을 항공기용 엔진 생산 시설로, 크루를 자동차 생산 시설로 정리하면서 1946년부터 롤스로이스와 벤틀리가 모두 크루에서 생산됩니다.

크루에서 벤틀리 생산이 시작되면서 큰 변화가 있었는데요. 전에는 모든 벤틀리가 롤링 섀시로 만들어져 코치빌더에 넘어가면 코치빌더가 차체를 만들어 얹고 구매자에게 인도했습니다. 즉 차체 생산을 모두 외부 코치빌더에게 맡긴 거죠. 그러나 크루 시대로 넘어오면서 이른바 ‘스탠다드 스틸 보디(standard steel body)’의 생산이 시작됩니다. 여전히 코치빌더가 차체를 만들기도 했지만, 표준화된 차체를 크루 공장에서 직접 얹어 출고하는 방식의 생산도 함께 이루어지게 된 거죠. 물론 차체 패널 생산은 프레스트 스틸(Pressed Steel)이라는 업체에 외주를 줬습니다. 프레스트 스틸은 나중에 몇 차례 인수합병을 거쳐 지금은 BMW 계열 브랜드인 미니의 차체 패널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마크 VI는 롤스로이스 계열 직렬 6기통 4.3L 엔진을 얹었고, 신뢰성이 좋아서 호평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당시까지 만들어진 벤틀리 중 가장 잘 팔리기도 했고요. 전시된 차는 1949년에 생산된 것으로, H.J. 뮬리너가 아직 독립 코치빌더였던 시절에 차체를 만든 241대의 마크 VI 중 하나라고 합니다.


1958년형 S1 컨티넨탈 플라잉 스퍼

1958년형 벤틀리 S1 컨티넨탈 플라잉 스퍼

벤틀리는 마크 VI에 이어 1952년에 R-타입을 내놓고, 1955년에는 그보다 더 개선된 S1을 내놓습니다. S1은 4도어 세단용 섀시가 먼저 나왔지만 오래지 않아 길이가 짧은 2도어 쿠페/컨버터블용 섀시가 추가되었습니다. 그 섀시를 쓴 모델에는 고성능을 상징하는 컨티넨탈(Continental)이라는 이름이 붙는데요. 그 S1 컨티넨탈 섀시를 바탕으로 H.J. 뮬리너가 4도어 세단 보디를 얹으며 새로 플라잉 스퍼(Flying Spur)라는 이름을 덧붙입니다. 지금 벤틀리 4도어 세단에 붙는 플라잉 스퍼라는 이름은 원래 벤틀리 오리지널 모델의 것이 아니라 H.J. 뮬리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죠. 물론 1959년에 H.J. 뮬리너를 롤스로이스-벤틀리가 인수했으니 플라잉 스퍼라는 이름을 쓰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게 되었고요.

전시된 1958년형 S1 컨티넨탈 플라잉 스퍼에는 직렬 6기통 4.9L 엔진이 올라갑니다. 선택 사항이었던 4단 자동변속기와 에어컨이 달려 있고요.


1963년형 S3

1963년형 벤틀리 S3

벤틀리 S 시리즈는 1955년에 나온 S1을 시작으로 1959년에는 S2로, 다시 1962년에는 S 시리즈 최종 버전인 S3으로 진화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벤틀리 엔진의 상징적 존재인 L 시리즈 V8 엔진은 S2 출시와 함께 쓰이기 시작했고, S3에서는 지금도 벤틀리의 얼굴을 상징하는 요소로 쓰이고 있는 네 개의 원형 헤드램프가 첫선을 보입니다. 그 덕분에 앞모습도 이전 세대와 크게 달라지죠.

그래서 1963년에 만들어진 전시차는 벤틀리 헤리티지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차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L 시리즈 V8 엔진 모델이기도 합니다. L 시리즈 엔진은 시기나 모델에 따라 배기량이 몇 가지로 나뉘는데, 이 차에 쓰인 것은 6.2L입니다.


1984년형 컨티넨탈

1984년형 벤틀리 컨티넨탈 컨버터블

1960년대 말에 롤스로이스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대형 여객기용으로 신형 제트 엔진인 RB211을 개발하던 도중에 많은 문제가 생기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빠진 거죠. 그래서 영국 정부가 나서 롤스로이스를 방산업체 비커스(Vickers)가 관리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롤스로이스-벤틀리가 비커스 계열사가 된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시기에 만들어진 벤틀리를 크루-비커스 벤틀리라고도 합니다.

빨간색(튜더 레드, Tudor Red) 차체가 화려한 1984년형 컨티넨탈 컨버터블은 전시된 차들 가운데 대표적인 크루-비커스 벤틀리 중 하나일 뿐 아니라 1965년에 등장한 T 시리즈의 후기형 모델이기도 합니다. T 시리즈는 처음으로 모노코크 차체 구조를 쓴 벤틀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요. 한동안 벤틀리 라인업 이름에서 사라졌던 컨티넨탈이라는 이름이 다시 쓰인 첫 모델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모델은 1971년에 나온 롤스로이스 커니시(Corniche)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컨티넨탈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는 벤틀리도 커니시라는 이름을 썼고요. 참고로 T 시리즈 기반 2도어 컨티넨탈은 컨버터블만 나왔습니다.

특별히 전시차가 의미 있는 이유는 처음 출고된 뒤로 2년간 회사 업무용 차로 당시 회장이 탔다고 합니다. 전시된 차들 가운데 V8 6.75L 엔진이 쓰인 첫 모델이기도 하고요.


1991년형 터보 R

1991년형 벤틀리 터보 R

벤틀리는 T 시리즈의 뒤를 잇는 모델로 새로 개발한 섀시를 바탕으로 한 뮬산(Mulsanne)을 1980년에 내놓습니다. 상당히 현대화된 스타일과 장비가 특징이고, 과거와 달리 상당히 각지고 낮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죠. 물론 근본적으로는 형제차인 롤스로이스 실버 스피릿과 거의 같았지만, 여전히 L 시리즈 V8 6.75L 엔진을 쓰는 전통을 이어 나갔습니다.

뮬산 가운데에서도 1982년에 선보인 뮬산 터보는 1920년대 ‘블로워 벤틀리(4 1/2 리터 슈퍼차저)’ 이후 처음으로 과급 엔진을 써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롤스로이스와 구분되는 스포티한 성격의 럭셔리 카라는 이미지를 다시금 내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고요. 다만 엔진 성능에 비해 무른 섀시에 불만을 표현한 구매자들이 적지 않았던지라, 서스펜션을 보강하는 한편 역대 벤틀리 처음으로 알루미늄 알로이 휠과 광폭 타이어를 다는 등 핸들링 특성을 개선한 모델을 내놓는데요. 그 모델이 바로 1987년에 선보인 터보 R(Turbo R)입니다.

1991년에 생산된 전시차에는 ABS와 얇은 스포츠 시트, 기어비가 큰 최종감속 기어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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