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부터 1999년까지 메르세데스-벤츠 디자인 책임자로 일하며 벤츠 확장기의 혁신적 차들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지휘한 브루노 사코(Bruno Sacco)가 90세를 일기로 작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사코는 2024년 9월 19일에 독일 진델핑겐에서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그는 이탈리아 우디네에서 태어나 토리노 폴리테크닉 대학을 졸업했고,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기아(Ghia)와 피닌파리나(Pininfarina)에서 짧은 기간 일한 뒤 1958년부터 메르세데스-벤츠(당시 다임러-벤츠)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디자인 부문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디자이너를 채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7년이었는데요. 사코는 디자이너 타이틀로 채용된 두 번째 인물이었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프랑스 출신으로 나중에 BMW와 푸조에서 일하기도 했던 폴 브라크(Paul Bracq)였고요. 처음에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일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며 반려자를 만나 뿌리를 내렸고 나중에는 독일 시민권도 얻었습니다.

이후 사코는 1975년에 승용차 부문 디자인 책임자로 임명되어, 1999년까지 무려 24년 동안이나 메르세데스-벤츠 디자인을 총 감독했습니다. 그가 디자인을 총괄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메르세데스-벤츠는 한편으로 자동차 엔지니어링 면에서 완벽을 추구했고, 사코는 그와 같은 제품 개발 방향에 걸맞은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래서 간결하면서도 우아하고,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우며,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스타일을 제품에 담았습니다.
그는 ‘메르세데스-벤츠는 메르세데스-벤츠다운 모습이어야 하고, 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즉 20세기 마지막 25년 남짓한 시기에 갖춰진 현대적 메르세데스-벤츠의 존재감은 사코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죠.


실제로 디자인 프로젝트를 총괄한 초기 제품인 W126 S-클래스는 고전적인 비례와 현대적인 디테일이 어우러져 고급 대형 세단 디자인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메르세데스-벤츠 가운데 디자인을 가장 좋아하는 R129 SL-클래스는 메르세데스-벤츠 디자인 흐름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된 차로, 간결하면서도 우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그의 최고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1980년대 이후 메르세데스-벤츠가 여러 새 모델과 함께 새로운 시장에 뛰어드는 확장 전략을 펼칠 때도 그의 역할은 컸습니다. 첫 소형 세단인 W201 190 시리즈, 첫 소형 해치백인 W168 A-클래스, 첫 크로스오버 SUV인 W163 M-클래스, 중소형 쿠페와 카브리올레 라인업의 독립을 이룬 C208/A208 CLK-클래스, 첫 소형 로드스터인 R171 SLK-클래스 등이 모두 그의 감독 아래 완성된 제품들이었습니다.

나아가 W124를 통해 독보적 입지를 차지한 E-클래스에 ‘네 개의 눈’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며 브랜드 모델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강조한 W210 E-클래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디자인 또는 스타일은 제품과 브랜드 이미지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그런 관점에서 사코는 메르세데스-벤츠가 추구했던 기술적 우수성과 뛰어난 내구성을 시각적 감성을 통해 뚜렷하게 소비자들에게 심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고급스럽고 멋있는 독일차’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고, 거기에 트렌디함까지 곁들이는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코는 독일 자동차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거장’이라 부르기에 부족함 없는 몇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6년 영국 자동차 월간지 ‘카(Car)’가 선정한 ‘디자이너의 디자이너(Designer’s Designer)’로, 1997년 ‘아이즈온 디자인(EyesOn Design)’의 평생 디자인 공로상 수상자로, 1997년 레이몬드 로위 재단(Raymond Lowey Foundation)의 ‘럭키 스트라이크 디자이너 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2006년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과 2007년 유럽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도 그런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입증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