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월간 비테스 2001년 7월호에 실린 시승기를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
자동차 칼럼니스트 혹은 자동차 잡지 기자라는 직업은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다. 말 한 마디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특히 사람들의 인식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얘기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팬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디자인한 혹은 그의 회사인 이탈디자인에서 디자인한 차가 모두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또한 탁월한 디자인이라고 칭송받을 만한 차들은 그의 전성기인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차들이다. 나는 그의 전성기 시절 차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시대를 불문하고 그가 디자인한 차들은 최소한 상업적으로 보았을 때 실패한 것이 거의 없었다.
요즘 주지아로 디자인 차들 또한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다. 차의 상품성이나 품질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디자인 감각이 돋보이는 것은 대중차는 대중차다운 심플함을, 고급차는 고급차다운 품위를 잘 살려낸다는 점이다.
다른 곳으로 잠시 얘기를 돌려보자. 주관적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본차들의 스타일 상 특징은 상당히 건조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한동안 곡면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차체가 보여주는 유연함이 장기였던 마쓰다의 차들에서도 일본식의 건조함을 느꼈던 것은, 습기가 많은 환경에 사는 일본인들의 건조함에 대한 무의식적 욕구가 반영되었으리라는 지나친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3년, 이런 건조한 차들 사이에서 유럽 감각의 습기가 느껴지는 차가 하나 등장했다. 바로 토요타의 아리스토였다. 내심 충격을 받은 것이, 마크 II, 체이서, 크레스타 등 오너 중심 세단은 물론 크라운, 센추리 같은 쇼퍼 드리븐 럭셔리 세단에 이르기까지 ‘세단=젠틀’이라는 공식을 꿋꿋이 지켜 나가던 토요타가 만든 차라고는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는 주지아로가 이끄는 이탈디자인에서 디자인한 첫 토요타 차였다.
물론 크라운 섀시를 응용해서 만들었고, 토요타 디자인 팀의 손질을 거친 터라 일본 냄새는 스타일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아리스토는 주지아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내 마음 속 토요타라는 회사의 이미지가 바뀌었다.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덩치 큰 공룡이 아니라, 이런 차도 만들 수 있는 회사기도 하구나.
차 자체의 성격도 기존 토요타 차들과는 사뭇 달라서, 1991년 렉서스 브랜드 출범과 함께 선보인 LS 400을 뒷받침하는 GS 300으로 자리를 잡았다. 세월은 흘러 토요타 아리스토와 렉서스 GS 시리즈는 2세대로 탈바꿈하며 토요타 독자 디자인을 입었지만, 기본 스타일 흐름에는 주지아로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 있다.
실제 타보기 전까지 나에게 차는 스타일로 기억되고 평가된다. 오늘 처음 대하는 렉서스 GS 300은 스포티함과 우아함이 고루 배어있는 개성미 넘치는 스타일이 매력있다. 겉으로부터 유러피언 럭셔리 스포티 세단 느낌이 물씬 풍긴다. 앞쪽이 듀얼 헤드램프와 균형을 이루도록 리어 컴비네이션 램프도 둥글게 나뉘어 있다. 옆 부분은 유리 뒷부분이 둥글게 마무리되어 엘레강스한 쿠페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깔끔한 옆면에는 휠 하우스 위에 블리스터 스타일이 살짝 배어 있어 역동적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멋진 외부 스타일에서 이 차의 성격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내에서는 여느 일본차들처럼 자잘한 장식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않은, 유럽식의 대범함이 느껴진다. 우드 그레인도 눈에 거슬리지 않고, 블랙 톤의 내장재에 최소한으로 들어간 크롬 장식에서는 겸양의 미덕마저 엿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실내는 건강한 느낌에 포근함과 조용함으로 대변도는 고급스러움이 잘 어우러져 있다. 세 개의 독립 원형 미터 패널은 흰색 바탕으로 시인성이 매우 뛰어나다. 계기를 둘러싼 테두리는 알루미늄 느낌의 링으로 처리되어 스포티한 느낌을 한층 강조한다.
뒷바퀴굴림 구동계 배치로 센터 터널이 높아 운전석이 독립된 기분이 든다. 운전자 자신도 모르게 침착해지고 적당히 긴장하게 되어 운전에 집중할 수 있다.
시트는 부담 없는 쿠션과 재질이 격조있는 편안함을 준다. 스티어링 휠의 지름과 두께, 감촉, 기어 레버의 굵기와 작동 감각도 최적의 수준이다. 선루프와 실내 조명 스위치들의 조작감각이 깔끔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려 공들인 느낌이 역력하다. 공기 조절장치와 오디오의 인터페이스는 간결하다. 액정식 표시장치는 낮보다는 밤에 더 뚜렷하게 보인다.
실내에 타고 있는 사람의 편안함을 위한 배려는 매우 뛰어나다. 실내 공간을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설계에 반영한 것이 아름다운 스타일과 어우러져 뛰어난 패키징을 만들어냈다. 전반적 실내 고안과 분위기는 여유롭지만, 고급차로서는 뒷좌석 편의장비가 많지 않다. 공간에 있어서도 좌우와 머리 위는 여유 있지만 앞뒤는 적당한 수준. 오너용 세단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토요타가 자랑하는 인공지능 가변밸브 타이밍 시스템인 VVT-i가 반영된 직렬 6기통 3.0L 엔진은 어느 회전영역에서도 진동이 작고 부드럽게 반응하며 나긋한 소리를 낸다. 최소한 엔진 소리만큼은 이 차가 스포티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잊게 만든다. 철저한 방음 탓도 있다. 실내로 들어오는 소음은 놀라우리만치 작다.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질 무렵이면 가느다란 바람소리에 묻혀 엔진 소리는 싱겁게 전달된다. 220마력이라는 출력은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맛깔나는 주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유 출력이 아주 조금만 더 크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든다.
스포티함이 강조되었음에도 운전자와의 상호작용이 상당히 편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GS 300의 뛰어난 점이라 할 수 있다. 평범하게 가속할 때나 거칠게 스티어링 휠을 다룰 때나 서스펜션은 의도한 것보다 좀 더 부드럽게 움직인다. 일상적으로 달릴 때 정직하게 반응을 하고, 버텨야할 부분에서는 비교적 잘 버틴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싱거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앞뒤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 조율도 잘 되어 있어 핸들링은 만족스럽지만, 정교함은 BMW와 메르세데스-벤츠의 중간 정도고 섬세함은 두 브랜드 차들에 비해 미세하나마 차체 뒤쪽에서 무언가 조금 흡수되어 버리는 듯한 부족함이 느껴진다. 물론 일반 운전자들은 느끼기 어렵겠지만, 좀 더 숙성이 필요할 듯하다.
스티어링 휠에는 포르쉐의 팁트로닉을 연상시키는 E 시프트 버튼이 달려 있다. 특이하게도, 버튼을 이용하는 것이 기어 레버를 조작할 때보다 반응이 빠른 느낌이다. 엄지손가락으로 다운 시프트, 검지손가락으로 업 시프트 하는 기분은 꽤 쏠쏠하다. 아이신제 5단 자동변속기의 변속감각은 매우 부드럽다. 가속에도 코너링에도, 답답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빠른 속도로 굽은 길을 감아 돌아 나가다 보면 업 시프트는 약간 빠르고 다운 시프트는 약간 느린 느낌이다. 그러나 수동변속기와 비교했을 때의 얘기일 뿐, 자동변속기로는 뛰어난 성능이다. 같은 아이신에서 만든 자동변속기라도 다른 서구 업체들 것과 비교하면 반응이 더 섬세하다. 섀시도 든든해 약간의 양념만 더해진다면 스포티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직접 몰아보고 느낀 점이지만, GS 300은 단순히 스타일로만 보아 넘길 차는 아니다. 값을 생각하면 GS 300은 BMW와 메르세데스-벤츠에 부러울 것이 없다. 게다가 뛰어난 유럽 스타일 안에는 유럽의 쟁쟁한 스포츠 세단을 위협할 만한 잠재력도 담겨 있다.
솔직히 운동 성능에서는 놀란 부분도 있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물론 아쉬움의 정도는 지극히 작다. GS 300은 충분히 조용하고, 충분히 부드럽다. 필요한 만큼의 ‘럭셔리’가 갖추어졌으니 ‘스포티’가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는 더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서스펜션을 조율하고 좀 더 공격적인 에어로 파츠로 단장한 스포트(Sport) 모델이 팔린다. 일본에서 팔리는 토요타 아리스토에는 같은 엔진에 트윈 터보를 더했거나 윗급인 렉서스 LS430에 얹히는 V8 4.3L 엔진이 올라가는 고성능 버전도 있다. 이런 모델들이 GS 시리즈의 본질적 개념에 더 잘 맞지 않을까. 국내 시장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이유로 차의 본질을 느낄 수 있는 기회조차 봉쇄되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렉서스라는 브랜드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2년,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고급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처럼, 목표를 높게 세우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BMW와 메르세데스-벤츠를 목표로 더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렉서스. GS 300은 충분히 높은 목표를 두고 차근차근 그 목표를 향해 접근하고 있는 렉서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멋진 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