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Hyundai_Grandeur_HG-1

[ 오토카 2011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필자와 같은 재야의 무소속 평론가가 국산 새 차를 타볼 일은 거의 없다. 국내 자동차 전문 매체들도 새 차 발표 때가 아니면 국산차를 경험하기 쉽지 않은 형편이니 불평할 염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공식 또는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몇몇 국산 새 차를 몰아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자국산 차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것은 자동차 평론가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새 차를 경험할 기회를 만들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이번에 경험한 차들은 내수 뿐 아니라 해외 시장에도 팔리고 있거나 팔릴 예정인 것들이다. 물론 그 중 일부는 내수 시장에 비중을 두고 개발된 모델이지만, 나머지는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많이 팔릴 차들이다. 대표적으로 현대 그랜저는 해외 시장에도 수출되지만 내수 판매가 주를 이룰 것이다. 반면 쉐보레 올란도는 해외, 특히 유럽 판매가 내수를 넘어설 것이 분명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차종마다 중점을 두고 있는 시장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음은 차를 둘러보고 몰아보면서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랜저는 참 잘 꾸며놓았다. 특히 장비 면에서는 정말 이 차급의 다른 차종과 비교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 보편적인 국내 소비자들이 느끼기에는 이 값에 이만한 상품성을 지닌 차가 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운동특성 면에서는 큰 감흥을 받기 어려웠다. 수치상으로 꽤 높은 편인 엔진 출력은 실제로 몸으로 와 닿지 않는다. 어느 정도 속도까지는 편안함과 든든함이 어우러지는 차체 움직임도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언제 이 균형이 무너질까 두려워진다. 차의 동적인 특성을 90퍼센트의 국내 소비자가 만족할 수준에 딱 맞춘 느낌이다. 필자가 그랜저에서 경험한 불안감은 나머지 10퍼센트의 소비자들도 쉽게 느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올란도는 거의 반대의 느낌이다. CF의 메시지(‘올란도의 본질은 드라이빙’)를 그렇게 정한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미니밴이라는 성격에 비해 달리기의 기본기가 꽤 탄탄하다. 언뜻 부드러움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다가도, 막상 오랜 시간 달리면서도 쉽게 피곤해지지 않는다. 큰 덩치에 비해 몸놀림도 부담스럽지 않다. 이런 기본기는 유럽에 내다 팔려면 당연히 갖춰야 하는 요소다. 그런데 평범한 국내 소비자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은 조금 부족하다. 꾸밈새에서는 미국 차의 투박함이 묻어나고, 장비구성에서는 값에 비해 풍성하게 차려진 느낌(현대기아차가 내수용 모델에서 강한)을 주지 못한다.

‘우리 제품을 많이 사 주는 시장의 요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반영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이라면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고민거리다. 메이커마다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은 제품을 통해 드러난다. 그랜저와 올란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랜저를 통해 필자가 읽은 현대의 제품철학은 대다수 국내 소비자들의 보편적인 사용행태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올란도가 전하는 쉐보레의 제품철학은 최소한 한국 시장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과거에 비하면 자동차 메이커마다 뚜렷했던 제품철학의 차이가 많이 희석되었음에도, 이런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반갑다.

현재의 제품철학을 놓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결론은 소비자의 선택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의 선택기준이 중요하다. 그 기준을 달리 말하면 소비자의 자동차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제품에는 시장의 요구가 반영되고, 시장의 요구는 소비자 개개인의 요구가 모여 만들어진다. 즉 자동차 메이커의 제품철학은 소비자의 철학에서 시작된다. 소비자의 자동차에 대한 철학이 뚜렷해야 자동차 메이커도 제대로 된 철학을 갖고 제품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