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2월에 네이버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
(* 비교적 얕은 수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다이하드’시리즈 팬인 본인과 브루스 윌리스 팬인 와이프의 의기투합으로, 우리 부부는 운좋게 ‘다이하드: 굿데이 투 다이’ 극장 개봉 첫 날 첫 회 상영을자리 텅텅 빈 동네 극장에서 마음 편히 볼 수 있었습니다. 기대가 크지 않았기에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영화에 대한 이러저런 얘기들을 풀어봅니다.
영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다이하드’ 시리즈는 주인공 존 맥클레인의 개고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1988년에 미국 LA에 있는 나카토미 플라자 빌딩에서 시작된 그의 개고생은 이번에 개봉한 ‘다이하드: 굿데이 투 다이’에서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체르노빌까지 이어지네요.

다이하드 시리즈 다섯번째 영화의 제목은 원래 ‘A Good Day To Die Hard’입니다. 국내에 들어오며 그 제목은 ‘다이하드: 굿데이 투 다이’로 바뀌었습니다. 007 시리즈 ‘Tomorrow Never Dies’가 ‘007 네버다이’로 바뀐 것보다는 낫지만 이런 손질이 원제의 느낌을 반감시키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 영화뿐 아니라 모든 ‘다이하드’ 시리즈의 스토리는 꽤나 단순합니다. 돈에 환장한 악당들이 못된 짓을 꾸미고, 어쩌다 보니 존 맥클레인은 그 못된 짓의 한 가운데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게 되죠. 뭔가 정상적이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몸을 사리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직업이 경찰인 그는 최소한 한 가지 몸에 밴 원칙이 있습니다. 나쁜 놈들은 싸그리 조져야 한다는 것. 혼자서 감당하기엔 벅찬 나쁜 놈들의 못된 짓 속에서 그는 언제나 그의 원칙을 지킵니다. 그 과정에서 죽어라 고생은 하지만, 결국 그의 원칙은 지켜지고 맙니다. 빈정거리는 듯한 ‘Yippee ki-yay, mothefxxker’라는 대사가 맥클레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게임은 이미 끝이 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케일이 점점 커져가는 ‘다이하드’ 시리즈는 한편으로는 전편인 ‘다이하드 4.0(원래 제목인 ‘Live Free Or Die Hard’는 도무지 간단한 우리말 표현으로 바꿀 수 없었나보다)’에서 이미 정점을 찍어버렸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다이하드: 굿데이 투 다이’는 그나마 전작보다는 SF적인 느낌을 줄이고 현실적인 쪽으로 방향을 바꾼 흔적이 보입니다. 물론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방향을 바꾼 흔적이 보이는’ 것이지, 실제상황 같은 느낌을 주는 맷 데이먼이 나오는 ‘본’ 시리즈나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 역을 맡으며 분위기를 바꾼 007 시리즈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다이하드 4.0’보다는 허풍이 덜하다는 거죠. 그리고 여전히 허풍이 세지만 흠잡을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보는 영화니까 충분히 용서됩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전폭적인 지원에 보답하려 여러 메르세데스-벤츠 차들을 영화 속에 등장시키다 보니 약간은 오버 액션한 부분도 있고, 마지막 액션 장면에서 맥클레인 부자가 살아남는 과정에서는 ‘다이하드 4.0’ 못지 않은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장된 느낌은 있어도 극중에 쓰인 메르세데스-벤츠 차들은 영화의 흐름 속에서 차마다 어울리는 역할을 잘 해내고,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전혀 방해하지 않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 차들이 떼거리로 등장하는 전반부를 빼면 나머지 부분에서는 거의 양념 수준이라 튀지도 않고요.
오히려 추격전이 벌어지는 내내 곳곳에 드러나 있거나 숨어있는 절묘한 라이벌 깔아 뭉개기는 차 좀 안다는 사람들이 보면 깨알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요즘 러시아 배경으로 하는 액션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 군용장비의 등장도 흥미로운 볼거리입니다. CG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실제 기체처럼 보이는 MI-24 하인드 공격/수송 헬기도 나오고, 세계에서 가장 큰 헬리콥터인 MI-26 헤일로도 등장합니다. 특히 후자는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첫 실제 기체라네요. 밀덕후들이 반길만한 부분입니다.
다만, 영화 속에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 자빠지는 가운데 시종일관 ‘가족 영화’ 분위기를 내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죠.

사실 그랬습니다. ‘다이하드’는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고, 분해된 가정의 재결합이라는 메시지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존 맥클레인의 전 부인 홀리 제나로 여사는 이미 존재감 제로가 됐지만 전편에서 아버지의 카우보이 기질을 닮은 딸내미가 등장한 데 이어, 이번에는 별로 닮은 구석 없는 아들내미가 CIA 요원으로 나와아버지와 함께 속고 속이는 러시아 나쁜 놈들을 제대로 조집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동네 똥개 보듯 하던 아들의 태도는 달라지고요. 참으로 아름다운 얘기죠. 찢어진 부자 관계가 함께 나쁜 놈들 조지면서 회복된다는. ㅋㅋ
그런데 아무리 나쁜 놈들이라지만 영화 속에서 죽어 자빠지는 사람들은 뭐 가족이 없나요? 총알이 빗발치고 폭발물이 뻥뻥 터지는 액션이 보는 이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사이, 영화 속에서는 남의 가족이야 미망인이 되든 고아가 되든, 우리 가족(엄마는 빼고)만 한데 뭉쳐 오손도손 잘 살면 그만이라는 얘기가 펼쳐집니다. 솔직히 그런 것까지 아름답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조금 더 나가면, 이전까지 미국 안에서 북치고 장구치던 뉴욕 경찰 존 맥클레인은 CIA 요원 아들내미 덕분에 얼떨결에 세계 안보를 위협하는 러시아 나쁜 놈들을 조지는 국제적인 영웅이 되고 있어요. 미국 경찰 나리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 거죠. 이게 무슨 쌍팔년도 감각의 센스란 말입니까… 인물만 나이든 존 맥클레인으로 바뀌었을뿐 군대 시절 형님 구하러 베트남에 뛰어든 존 람보나 납치된 딸내미 구하려 중미 용병 소굴을 아작내는 존 매트릭스 중령과 전혀 다를 게 없잖아요(그리고 보니 다들 이름이 ‘존’이시구랴…).
뭐 이러저런 기분나쁜 영화속 코드들은 저 같은 반골 빨갱이의 삐딱한 시선으로나 보이는 것들이고, 그런 것들을 빼면 시원시원한 액션 장면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답게 아주 볼만합니다. 그리고 영화 자체만 본다면 무척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영화에요. 스케일, 화끈함으로는 동급 다른 영화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습니다. 다만 간간이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눈에 뜨이는데, 아마도 15세 관람가 등급에 맞추기 위해 적당히 편집한 결과라는 생각이 드네요.
1시간 40분 정도 되는 상영시간동안 신나는 총질과 파괴가 여러번 이어지는데,
1. 모스크바 법원 습격, 탈출에서 이어지는 추격전
2. 모스크바 안전가옥 피습 및 탈출
3. 모스크바 호텔 연회장 개박살
4. 체르노빌 건물 로비 총격전
5. 체르노빌 헬기 개박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영화의 거의 전부고, 예고편에 모두 담겨져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고편은 티저가 아니라 다이제스트입니다. 시간 순서를 뒤섞은. ㅋㅋㅋ 예고편을 보고 난 후에 본편을 보니 비교가 되면서 더 재미있어지더군요.

영화 끝나고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문득 영화 ‘리썰웨폰’에서 로저 머터프가 내뱉었던 ‘I’m too old for this shit’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삽질 하기에 난 너무 늙었어’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브루스 윌리스가 왠지 영화 찍으면서 그 소리가 무척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극중 존 맥클레인도 적잖은 나이일텐데 아직도 현역 경찰인 걸 보면, 미국도 이제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와이프는 영화에 등장한 메르세데스-벤츠 G 클래스가 갖고 싶어졌어요. 나중에 돈 벌면 폭스바겐 투아렉 사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좀 더 열심히 일하고 좀 더 돈을 모아야 할 모양입니다. 명품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 와이프의 얘기는 결혼 6년 만에 거짓말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P.S. 메르세데스-벤츠가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총 14가지 메르세데스-벤츠(마이바흐 포함) 차가 등장한다는데, 그렇게 많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이거 숨은 그림 찾기인가봐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