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매거진 2014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벤틀리 창업자 월터 오웬 벤틀리가 최고급 차 시장을 노리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모델이 8리터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사용한 8리터 엔진은 크고 무거운 차체로도 엄청난 성능을 이끌어 냈고, 고성능 차이면서도 부드럽고 조용해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대공황 시기와 맞물려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고, 경영난에 몰린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에게 인수되어 8리터의 운명도 끝을 맺고 말았다.

월터 오웬 벤틀리(Walter Owen Bentley, 1888~1971)는 1919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자동차 회사를 세워 1920년대에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다섯 번이나 우승 컵을 거머쥐었고, 우승 컵의 후광에 힘입어 4기통 엔진을 얹은 스포츠카인 3리터와 4.5리터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성공에 고무된 그는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욱 크고 고급스러운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벤틀리가 먼저 내놓은 모델이 더 큰 섀시와 엔진을 사용한 6.5리터였고, 이를 바탕으로 당대 유명한 고급 브랜드 차들과 경쟁할 더욱 큰 차를 만들기로 했다. 그 결과 인기 모델이었던 스피드 식스(Speed Six)를 키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최상위 모델이 벤틀리 8리터다.

당대 영국 승용차 중 가장 크고 빨라

1930년 10월, 런던 올림피아 오토쇼에서 첫선을 보인 8리터는 등장과 함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이 차는 크기가 엄청나, 당시까지 나온 벤틀리는 물론 영국에서 생산된 모든 승용차 가운데 가장 컸다. 벤틀리는 기본 섀시에 구동계를 더한 롤링 섀시만 만들었고, 차체는 전부 J. 거니 너팅(J. Gurney Nutting), 반덴 플라(Vanden Plas), H. J. 멀리너(Mulliner), 파크 워드(Park Ward) 등 코치빌더에게 제작을 맡겨 대부분 세단과 쿠페로 만들어졌다.

거대한 철제 프레임은 파이프 형태의 크로스멤버 7개를 가로로 배치해 차체를 탄탄히 지지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차체에는 알루미늄 합금이 많이 쓰였지만, 그럼에도 차 무게는 대부분 2톤에 가까웠고 사용한 보디에 따라서는 2톤을 훌쩍 넘긴 것도 있었다. 네 바퀴 모두에 반원형 판 스프링이 쓰였고 앞뒤 모두 지름이 400mm에 이르는 대형 드럼 브레이크 역시 모두 서보 어시스트 방식을 쓰는 등 고급차 다운 첨단 설계가 돋보였다. 휠베이스는 145인치(3,658mm)와 153인치(3,962mm)의 두 종류였다.

8리터라는 모델 이름이 말해주듯 긴 보닛 아래에는 직렬 6기통 8리터(7,983cc) 엔진이 담겨 있었다. 실린더의 보어와 스트로크는 각각 110mm와 140mm로, 실린더 하나의 배기량만 1,300cc에 가까웠다. 실린더 블록과 헤드는 주철, 크랭크케이스는 일렉트론(Elektron)이라는 이름의 마그네슘 합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실린더당 4밸브 구조와 점화 코일과 마그네토를 나란히 사용하는 트윈 스파크 점화장치로 성능을 높여 최고출력이 203마력에 이르렀다. 커다란 엔진에서 만들어진 힘은 4단 수동변속기를 거쳐 뒷바퀴로 전달되었다. 최고 단인 4단의 기어비는 요즘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3.5:1로, 최저 시속 10km부터 최고 시속 167km에 이르는 엄청난 속도영역에서 기능을 발휘할 정도였다. 엔진과 변속기는 고무 마운트를 통해 섀시에 결합되어 진동이 적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능이었다. 시속 16km에서 시속 161km까지 가속하는 데 50초가 걸리는 가속 능력은 당대 차로는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최고시속은 160km에 이르렀는데, 이는 롤스로이스 팬텀 II, 메르세데스-벤츠 슈퍼차저 모델들, 부가티 타입 57 등 라이벌들과 비교해도 우위를 자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벤틀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 브랜드였던 롤스로이스의 간판 모델 팬텀 II보다 최고 시속은 거의 16km 남짓 빨랐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롤스로이스가 내놓은 어느 모델도 그 정도의 최고시속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벤틀리는 8리터를 내놓으면서 어떤 형태의 차체를 얹더라도 최고 시속 160km 이상을 낼 수 있다고 자랑했다. 이는 경주용 차가 아닌 일반 도로용 차로는 경이적인 성능이었다. 크고 빠른 차가 조용하고 부드럽기까지 한 차에 극찬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극찬 받았지만 대공황 여파에 주저앉아

그러나 8리터는 등장 시기가 좋지 않았다. 판매가 시작된 것은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유럽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경제난 속에 주 고객층인 실업가와 연예인들은 당대 가장 비싼 차에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았다. 개발과 생산을 위해 투입된 자금에 비해 판매는 더디기만 했고, 그나마 판매되는 차도 많지 않았다.

사실 8리터를 개발하고 있을 때에도 벤틀리의 경영 사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1925년에 자산가인 울프 바나토(Woolf Barnato)가 실질적인 인수와 더불어 재정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무너졌을 회사였다. 바나토는 자신이 구입한 차로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출전해 3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벤틀리 보이’ 중 하나다.

그러나 불황 앞에서는 바나토도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1931년에 벤틀리에 재정지원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벤틀리의 자산은 경매에 붙여지고, 그 자산은 벤틀리의 경쟁 회사였던 롤스로이스가 인수하고 말았다. 8리터가 출시된 후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벤틀리가 롤스로이스에 인수된 계기를 8리터의 실패에서 찾기도 한다. 

월터 오웬 벤틀리가 자신이 경영하던 회사에서 열정을 쏟아 만든 마지막 차인 8리터는 모두 100대가 생산되었다. 그 중에서 롤스로이스에게 인수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은 67대였고, 나머지 33대는 인수 후에 완성되었다. 놀랍게도 100대 가운데 최근(2011년)까지 78대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16대만 만들어진 오픈 모델 가운데에서도 12대가 보존되어 있다.

월터 오웬 벤틀리는 롤스로이스가 회사를 인수한 후에도 롤스로이스에서 일할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단 차에 자신의 열정을 담을 수 없게 되자 1935년에 회사를 떠나 라곤다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벤틀리는 1933년 이후 롤스로이스의 기술로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벤틀리 브랜드는 롤스로이스의 엔트리급 모델로 내려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