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매거진 2014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메르세데스-벤츠 최고의 명차 중 하나인 300 SL과 꼭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190 SL은 미국에서 특히 큰 인기를 얻었다. 일반 승용차 설계를 응용해 성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300 SL의 후광 덕을 크게 보았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이 차의 경험을 바탕으로 컨버터블 양산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메르세데스-벤츠 역사에서 최고의 명차 중 하나로 손꼽히는 300 SL이 맥스 호프먼(Max Hoffman)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물론 BMW, 재규어, MG, 포르쉐 등 여러 유럽 차를 미국에 판매하던 그는 미국인이 선호하는 차를 생산하도록 유럽 자동차 업체에게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300 SL 역시 호프먼의 조언에 따라 개발된 차였다.

보수적인 디자인의 승용차가 전부였던 1950년대 초반 메르세데스-벤츠 라인업은 한창 규모가 커지고 있던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호프먼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300 SL 같은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 메르세데스-벤츠가 내놓은 답변이 바로 300 SL이었다.

300 SL과 닮은꼴이었지만 뼈대는 달라

300 SL의 데뷔 무대였던 1954년 뉴욕 모터스포츠 쇼에는 스포티한 스타일을 지닌 또 한 대의 메르세데스-벤츠가 전시되었다. 190 SL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화려한 걸윙 도어를 갖춘 300 SL이었지만, 양산을 앞둔 프로토타입으로 선보였던 190 SL도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두 차는 190 SL이 더 작다는 점을 빼면 쌍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비슷했다.

그러나 두 차는 근본부터 달랐다. 300 SL의 개발은 루돌프 울렌하우트(Rudolf Uhlenhaut)가 이끄는 레이스 부서에서 맡은 것과 달리, 190 SL은 프리츠 날링어(Fritz Nallinger)의 승용차 부서에서 주도한 데에서도 두 차의 성격 차이를 알 수 있었다. 190 SL은 당시 메르세데스-벤츠의 주력 승용차로, 폰툰(Ponton)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180(W120/121) 플랫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생산이 까다로운 300 SL과 달리 190 SL은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호프먼이 바라던 차는 300 SL이었지만, 시장성을 보면 190 SL이 더  중요했다.

뉴욕 모터스포츠 쇼에서 프로토타입이 호평을 얻자, 메르세데스-벤츠는 양산을 위해 디자인과 기계적인 부분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디자인 변경은 발터 해커(Walter Häcker)가 주도했다. 손질은 전반적으로 300 SL의 이미지를 담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보닛은 높이를 약간 낮추는 대신 가운데를 돌출시켜 엔진이 놓이는 공간을 마련하고 강력한 느낌을 강조했다.

300SL에서 엔진을 기울이면서 보닛 좌우로 이른바 ‘파워 돔’을 만든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라디에이터 그릴의 형태는 물론, 휠 아치에 눈썹 모양의 돌출부를 더한 것도 300 SL의 디자인을 흉내낸 것이었다. 프로토타입에서는 바퀴 주변 전체를 크게 부풀렸던 뒤 펜더는 양산형이 되면서 부풀린 정도를 줄이는 대신 앞 펜더와 비슷하게 눈썹 모양의 돌출부를 만들었다. 그밖에도 범퍼와 대시보드 등 여러 곳의 디자인이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190 SL을 더욱 300 SL의 축소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차체는 대부분 강판으로 만들었지만, 보닛과 트렁크 리드, 도어 실과 도어는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했다. 무게는 약 1,200kg이었는데, 원래 개발 당시 목표는 공차중량을 1,000kg 선으로 맞추려고 했지만 하체를 보강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무게가 늘어났다고 한다. 엔진은 190 SL 전용으로 개발된 직렬 4기통 1.9리터 105마력 휘발유 엔진 하나뿐이었다. 체인 구동식 OHC 밸브 구조가 쓰인 이 엔진은 배기량이 같은 세단용 구식 사이드 밸브 엔진보다 출력이 더 높았다.

변속기는 4단 수동 한 가지였고, 다른 승용차에도 쓰이는 것을 부분적으로 손질해 썼다. 하체는 180 세단의 것을 조금 줄인 것으로, 뒤 서스펜션 일부 부품은 180 세단의 것을 활용했지만 차축 구조는 나중에 메르세데스-벤츠 여러 모델에 쓰이게 되는 싱글조인트 스윙 액슬 구조를 새로 개발해 사용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 부품을 180 세단에서 가져온 덕분에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미국에서 전체 생산대수 80퍼센트 팔려

디자인이 확정된 190 SL은 1955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였고, 그해 5월부터 이미 300 SL이 생산되고 있던 진델핑엔 공장에서 양산이 시작되었다. 300 SL은 쿠페부터 만들어졌지만 190 SL은 컨버터블부터 만들어졌다. 당초 시속 190km까지 내는 것이 개발진의 목표였지만, 실제로는 시속 170km 정도가 한계였다. 값은 당시 인기 있던 포르쉐 356보다 비쌌지만 300 SL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특히 300 SL과 닮은 디자인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90 SL이 가장 인기를 얻은 시장은 미국이었다. 전체 생산량의 80퍼센트 정도가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1956년에는 미국에서 팔린 3,109대의 메르세데스-벤츠 가운데 1,849대를 190 SL이 차지하며 메르세데스-벤츠 역대 판매 기록을 갈아치우는데 핵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4년까지 몇백 대 수준에 머물던 메르세데스-벤츠의 미국 판매는 1955년에 2,000대를 넘겼고, 1957년에는 6,048대로 2년 만에 세 배 가까이 늘어났다.

모터스포츠 출전을 위한 모델도 만들어졌다. 맥스 호프먼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클럽스포츠 버전을 시작으로, 여러 GT 클래스 경주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모델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는 300 SL의 뛰어난 성능과 비교된 탓도 컸다. 스포티한 스타일의 컨버터블이었을뿐, 순수 스포츠카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을 의식해 메르세데스-벤츠는 190 SL을 ‘스포츠 투어러(sports tourer)’라는 애매한 장르로 이야기했다.

190 SL은 메르세데스-벤츠 관점에서는 스포츠카의 양산 가능성을 점치는 기회이기도 했는데, 판매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으로 이후 후속 모델을 적극 개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300 SL과 190 SL은 오늘날 SL 클래스와 SLK 클래스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현대적인 메르세데스-벤츠 컨버터블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0 SL은 1955년부터 1963년까지 2만 5,881대가 생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