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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 2014년 7월 28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

영화 007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 중 하나는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차로 등장하는 이른바 본드카다. 영화를 통해 애스턴 마틴 DB5가 본드카로 인기를 얻었지만, 원작 소설에서 본드가 개인적으로 쓴 차로 묘사된 것이 벤틀리라는 사실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1953년에 플레밍이 발표한 007 시리즈 첫 소설 ‘카지노 로얄’에서는 본드의 차에 관해 “앰허스트 빌리어스가 만든 슈퍼차저를 단 마지막 벤틀리 4.5리터 중 한 대로, 1933년에 거의 새 차 상태로 구입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조심스레 보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007 시리즈 원작 소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본드카와 관련된 이야기다.

이 부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앰허스트 빌리어스라는 사람 이름이다. 구체적인 묘사가 재미를 더하는 소설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내용과 크게 관련이 없는 사람 이름이 등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플레밍은 1964년에 했던 미국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본드의 자동차로 벤틀리를 선택한 이유를 “빌리어스와 절친한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플레밍이 소설 속에 굳이 빌리어스의 실명을 집어넣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이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벤틀리라는 차 자체보다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본드카 결정을 좌우한 셈이다.

빌리어스는 자동차 및 항공우주 엔지니어였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 경과 친분이 있을 정도로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두었고, 자동차를 좋아하는 영국 사회 재력가들과도 가까이 지내며 경주용 차와 스포츠카 개조에 열을 올렸다. 그는 당대에 취미로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던 재력가 팀 버킨의 벤틀리 경주차를 개조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이미 벤틀리로 1928년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우승한 바 있던 버킨은 다시금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빌리어스가 개발한 슈퍼차저(엔진의 회전을 이용해 엔진 성능을 높이는 장치)를 자신의 벤틀리 4.5리터에 달아 성능을 높였다.

버킨의 고성능 벤틀리 4.5리터에는 슈퍼차저를 뜻하는 속칭인 블로워라는 별명이 더해져 블로워 벤틀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블로워 벤틀리는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는 기대했던 만큼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성능으로 주목받았고, 1930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2위에 올라 체면치레를 했다. 블로워 벤틀리는 모두 55대만 만들어져 희소성이 무척 높다. 그런 차 중 하나가 소설 속 본드카로 등장한 것이다. 상상 속의 일이지만, 제임스 본드의 벤틀리가 실제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출전했던 차와 같은 모델이라는 것은 놀라운 우연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