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에보(Evo) 한국판 2016년 10월호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한때 ‘세계의 기준’을 자처했던 캐딜락은 석유파동으로 큰 타격을 입은 뒤 좀처럼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최근 대대적인 체질 개선과 방향 전환을 통해 힘을 키우고 있는 캐딜락의 과거, 현재, 미래를 짚어본다.
캐딜락은 오랫동안 미국을 상징하는 럭셔리 브랜드였다. 자동차 태동기에는 탁월한 정교함과 신뢰성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후 업계의 자동차 만들기에 기준을 제시했다.

당시 캐딜락은 ‘세계의 기준(Standard of the World)’라는 자신감 넘치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슬로건을 내세울 만 했다. 새 제품에 새로운 기술을 반영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고, 캐딜락이 받아들인 기술은 다른 회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브랜드가 자취를 감춘 1930년대 초반의 대공황에도 살아남았고,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세계의 패권을 쥔 미국의 풍요로운 경제를 대표하는 아이콘 역할을 했다.
자동차 역사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캐딜락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화려해졌다. 그러나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던 끝은 갑자기 찾아왔다. 캐딜락이 사상 최대 판매량을 기록한 1973년. 석유파동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은 미국 자동차 산업은 붕괴 위기에 놓였다. 미국 소비자들은 디트로이트가 만들어낸 크고 기름 많이 먹는 차들을 외면했다. 미국 자동차 업계가 시장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 본의 아니게 비어있던 시장을 노린 경쟁자들이 빠르게 자리를 차지했다. 캐딜락을 사던 사람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 유럽 럭셔리 브랜드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캐딜락은 소비자들이 발길을 돌린 이유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시장 점유율과 수익성에만 신경을 쓴 탓에 매력 없는 차를 터무니없는 값에 내놓았고 내놓는 모델마다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다. 첫 소형차인 시마론과 이탈리아 카로체리아인 피닌파리나를 등에 업은 알란테 같은 새로운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하며 차뿐 아니라 브랜드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캐딜락은 나이든 구세대를 위한 차라는 이미지만 남기고 1990년대까지 내리막길을 계속 미끄러져 내렸다. 캐딜락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모든 자동차 브랜드들이 같은 이유로 그 시기에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주어진 과제는 분명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해답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몰랐다.
낡은 개념의 여러 대형 세단이 사라진 1990년대 후반에는 카테라, 스빌, 드빌, 엘도라도로 라인업이 많이 축소되기에 이른다. 오펠 오메가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카테라는 1980년대 시마론의 실패를 답습한 끝에 조용히 사라졌고, 작아진 시장에서 근근이 명맥을 이은 엘도라도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21세기를 앞두고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다

1999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SUV 붐에 편승한 에스컬레이드가 풀 사이즈 SUV 시장에서 나름의 입지를 만든 것을 빼면 캐딜락은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존재였다. 재기의 불씨가 된 에스컬레이드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캐딜락을 찾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소비자들이었다. 힙합 뮤지션과 육상 영웅 같은 흑인 유명인들은 에스컬레이드로 캐딜락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캐딜락 브랜드 전체에 힘을 불어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1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GM은 캐딜락을 어떻게든 되살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브랜드가 지닌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장에서 대중차 브랜드의 수익성이 낮아지고 있었다. 캐딜락 같은 럭셔리 브랜드가 시장을 되찾아야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전의 낡은 브랜드 이미지를 벗고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같은 유럽 럭셔리 브랜드로 쏠린 소비자의 관심을 다시 캐딜락으로 돌려야 했다. 전에 없던 혁신이 필요했고, 21세기를 앞둔 캐딜락은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세련된 자동차 만들기와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달라진 캐딜락을 알려야 했다.

캐딜락의 반격을 알리는 신호탄은 1999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화려한 빛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칼로 베어낸 듯 날카로운 선과 대담한 면이 사방을 휘감은 2인승 로드스터 콘셉트카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새로운 브랜드 색깔을 선언한 그 차의 이름은 이보크(Evoq)였다. 이보크와 함께 캐딜락은 새로운 디자인의 의미를 아트 앤 사이언스(Art & Science)라는 표어로 정리했다. 우리말로는 예술과 과학의 공존으로 풀이할 수 있는 이 표어는 디자인과 기술의 조화를 뜻하는 것이다. 구시대 이미지를 벗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으로 좀 더 젊은 소비자를 끌어안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트 앤 사이언스는 2000년에 나온 이마즈(Imaj)와 2001년의 비존(Vizon) 등 콘셉트카로 이어지며 달라질 캐딜락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부풀게 했다. 그리고 2003년에 나온 식스틴(Sixteen) 콘셉트카는 그 정점에서 전성기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울트라 럭셔리 시장에 대한 캐딜락의 야심을 보여주었다.

아트 앤 사이언스는 이후 등장한 여러 양산차를 통해 변주되었고, 그 시작은 2002년에 나온 CTS였다. CTS는 캐딜락의 혁신이 디자인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단계적으로 모든 모델에 퍼졌던 앞바퀴 굴림 방식을 버리고, 야심 차게 새로 개발한 뒷바퀴 굴림 시그마 플랫폼을 처음으로 썼다.
시그마 플랫폼은 처음부터 독일 럭셔리 브랜드와 정면으로 대결할 의도로 역동성과 안정성에 초점을 맞춰 개발되었다. CTS를 시작으로 같은 플랫폼을 활용한 크로스오버 SRX와 CTS보다 조금 더 큰 STS가 공세에 나섰다. 그와 더불어 풀사이즈 세단인 DTS를 빼면 주력 모델 모두가 뒷바퀴 굴림 기반으로 바뀌게 되었다.
캐딜락은 그들을 위협한 차들에 정면 대결하기 위해 더 가볍고, 더 잘 달리고, 더 세련된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보다 품질과 성능도 훨씬 좋아졌다. 그러나 소비자가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소비자들이 캐딜락에서 독일이나 일본 럭셔리 카만큼 만족을 얻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들이 있었다. 시그마 플랫폼의 새 모델들은 좀 더 숙성되어야 했다. 이미 시장에서는 독일과 일본 차들이 차의 크기와 가격 등 여러 면에서 기준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 캐딜락 차들은 제자리를 쉽게 찾지 못했다. 과거 세계의 기준이었던 캐딜락이 새로운 세계의 기준을 좇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바닥을 딛고 일어서 도약을 준비하다

이보크 콘셉트카가 첫선을 보였던 디트로이트 모터쇼는 8년 뒤, 아트 앤 사이언스의 첨병인 CTS의 2세대 모델이 데뷔하는 무대가 되었다. 2세대 CTS는 1세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큰 야심을 품은 채 더 탄탄하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캐딜락의 산실인 GM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다. 고유가 시대가 본격화되며 수익성 높은 대형차 판매가 줄었고, 퇴직자 보험과 연금은 재정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동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GM에 치명타를 날렸다. 자동차보다 금융사업 쪽의 수익 의존도가 높았던 탓에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은 것이다.
결국 GM은 미국 정부에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구제금융 투입에 이어 상장이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GM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수익성 낮은 계열 브랜드들이 사라졌고, 옛 GM은 부채와 함께 사라지고 새로운 GM이 만들어졌다. GM에게도 어려운 시기였지만, 다시 일어서려던 캐딜락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소형 럭셔리 시장의 문을 두드린 BLS는 단명했고, 시장에서 입지가 애매했던 STS도 명맥이 끊겼다.
몇 년 동안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함께 본격적인 체질 개선이 이루어지고 경영진이 대거 교체되면서 캐딜락에도 다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2011년 페블비치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시엘(Ciel)에 이어 2013년에는 엘미라즈(Elmiraj) 콘셉트카를 선보였다. 모두 이전 세대 캐딜락 차들과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의 진화는 물론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초대형 시장에 다시 힘을 싣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2013년 말 GM은 정부 구제금융을 모두 갚았고, 2014년에는 GM 역사상 첫 여성 CEO인 메리 바라가 회사를 이끌게 되었다. 메리 바라 CEO는 캐딜락을 재건하기 위해 두 가지 과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 소비자의 마음을 되돌려놓는 것, 다른 하나는 이미 커져 있는 SUV 수요를 채울 라인업을 갖추는 것이었다. 제품과 숫자에만 매몰되기보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소비자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새로운 경영진은 지금까지 캐딜락이 해온 것보다 더 급진적이고 뚜렷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14년 7월에 새롭게 캐딜락의 수장이 된 요한 드 나이셴(Johan de Nysschen)과 그보다 앞서 캐딜락 최고 마케팅 책임자(CMO)로 자리를 옮긴 우베 엘링하우스(Uwe Ellinghaus)는 새로운 전략으로 변화를 이끌고 있다. 드 나이셴은 아우디와 인피니티에서, 엘링하우스는 BMW에서 경력을 쌓았다. 캐딜락이 되돌려놓고 싶은 소비자의 취향을 잘 알뿐더러 그동안 캐딜락이 놓치고 있던 것들도 끄집어낼 수 있는 인물들이다.
앞으로 캐딜락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엘링하우스 CMO는 브랜드가 제품을 뒷받침하기보다 이끄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고 있다. 앞으로 몇 년 내에 X세대와 Y세대가 캐딜락 구매자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있다.

디트로이트에 있던 본사를 뉴욕으로 옮긴 것도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본사를 옮긴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 굴뚝 산업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디트로이트를 벗어나, 미국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에 본사를 둠으로써 제조업체 이미지를 떨쳐버리려는 것이다. 새로운 본사 건물 1층에 만든 캐딜락 하우스에서도 그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 2016년 6월에 문을 연 캐딜락 하우스는 캐딜락 제품을 둘러보면서 문화와 예술, 패션 업계 관계자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마케팅은 늘 좋은 제품이 뒷받침해야 성공한다.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으며 소비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모델을 내놓지 못한 캐딜락은 브랜드가 변화하고 있음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그러나 캐딜락이 앞으로 내놓을 차들은 이전보다 더 치밀하게 구성되어 시장에서 빈틈을 메워나갈 예정이다. 드 나이셴 사장은 2015년 4월에 향후 5년에 걸쳐 8종의 신차를 내놓을 것이며, 그를 위해 120억 달러(약 13조 2,720억 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에 따르면 캐딜락은 2020년에 5종의 세단과 5종의 SUV로 라인업을 갖추게 된다. 2014년부터 새로운 모델 이름 체계를 도입하면서 세단은 CT, SUV는 XT로 시작해 상대적 차급을 뜻하는 한 자리 숫자를 더한 이름이 새 모델에 단계적으로 쓰인다. 현재의 ATS보다 작은 엔트리급 세단과 CT6 윗급으로 메르세데스-벤츠 S 클래스 등과 경쟁할 초대형 세단이 나오고, 콤팩트 크로스오버 SUV 2종과 7인승 SUV도 더해진다. ATS 기반의 쿠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기술이 쓰인 모델도 나올 예정이다.

미국 이외 지역, 특히 중국 시장에서의 영향력도 꾸준히 키우고 있다. 중국은 어느새 미국 다음으로 캐딜락이 많이 팔리는 시장이 되었다. 2015년에 중국에서 팔린 캐딜락은 7만 9,779대로 2014년보다 17% 늘어났다. 미국에서 17만 5,267대가 팔려 2.6% 성장한데 그친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수준이다. 중국에서는 2010년에 전 세계 캐딜락 판매의 10%를 소화했지만 2015년에는 28.7퍼센트로 30% 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 같은 성장세라면 5년 내에 중국 판매가 미국 판매를 앞지를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에 따라 캐딜락은 지난 1월에 상하이에 연산 16만 대 규모의 공장을 완공하고 CT6와 XT5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캐딜락의 목표는 2020년까지 중국 럭셔리 시장에서 점유율 10%를 차지하는 것이다.
2015년에 캐딜락이 전 세계에 판매한 차는 27만 7,868대로 2014년보다 7.5% 늘었다. 중국 판매가 크게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그 밖의 주요 시장에서 대부분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변화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밝은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올해 출시한 CT6과 XT5 이후로 2018년 중반에 완전한 새 모델이 나오기까지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공백기를 버텨야 한다. 럭셔리 시장에서의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본고장 미국에서는 독일과 일본 럭셔리 브랜드의 공세에 제네시스 브랜드까지 끼어들었다. 2020년까지 글로벌 판매를 50만 대로 늘리겠다는 드 나이셴 사장의 이야기가 실현될 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대의 ‘캐딜락다움’을 무엇으로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는 큰 숙제가 캐딜락 앞에 놓여있다. 물론 지금의 캐딜락은 빠르게 바뀌는 시장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던 모습은 슬슬 떨쳐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케팅에 신경을 쓰고, 새 모델을 통해 달라진 캐딜락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캐딜락은 조금씩 입지를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있다. 올해 페블비치 콩쿠르 델레강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은 에스칼라(Escala) 콘셉트카는 캐딜락이 주어진 숙제를 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캐딜락이 숙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세계의 기준이라는 과거의 슬로건을 부활시켜도 좋을 것이다.
The first made by Cadillac | 캐딜락이 역사에 남긴 최초의 기록들
1912 셀프스타터

차의 시동을 거는 일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찰스 케터링이 발명한 셀프스타터를 단 캐딜락을 산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아무도 시동 버튼을 누르며 ‘이 차가 나를 죽거나 다치게 하면 어쩌나’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차의 시동을 거는 일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찰스 케터링이 발명한 셀프스타터를 단 캐딜락을 산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아무도 시동 버튼을 누르며 ‘이 차가 나를 죽거나 다치게 하면 어쩌나’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1915 양산 V8 엔진
미국인들은 한동안 V8 엔진을 무척 사랑했다. 평범한 승용차에서 픽업트럭에 이르기까지, V8 엔진은 미국 브랜드 차의 보닛 아래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V8 엔진을 그렇게 흔한 존재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캐딜락이다. 다운사이징이라는 말이 사전에 없던 시절 얘기다.
1930 V16 엔진
2003년에 캐딜락이 만든 식스틴 콘셉트카는 실린더가 16개나 있는 엔진을 품었다. 요즘도 실린더 수가 12개를 넘는 엔진은 드물지만, 캐딜락은 그보다 73년 전에 이미 크고 아름다운 V16 엔진을 만들어 차에 얹었다. 배기량 7.4L 엔진이 내는 힘은 고작(?) 160마력이었다.
1940 하이드라매틱 변속기

요즘은 수동변속기 차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1940년에 캐딜락이 하이드라매틱 변속기를 개발하기 전에는 완전 자동변속기 차를 아예 찾을 수 없었다. 기어 레버를 D 위치에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차가 달리는 것이 신기한 시절이 있었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1964 컴포트 컨트롤
원하는 온도만 선택하면 실내로 들어오는 공기를 알아서 데우거나 식히는 자동 공기조절장치가 등장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캐딜락이 만든 첫 자동 공기조절장치는 요즘 차들에서 볼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무척 단순한 기술로 만들어졌다. 어쨌든 편하면 그만 아닌가.
1981 가변 배기량 엔진
연료소비를 줄이기 위해 실린더 비활성화 기술을 쓴 차들은 요즘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전자장비가 발달하면서 정밀한 엔진 제어가 가능해진 덕분이다. 캐딜락이 이 기술을 처음 선보였을 때의 전자장비는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되었다. 한동안 죽은 기술이 된 이유다.
1999 나이트 비전

‘밤길 조심해라’는 원한관계인 사람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다. 누구나 밤길 운전은 조심해야 한다. 나이트 비전은 열 영상 기술로 밤에도 사람이나 동물을 알아볼 수 있는 장치다. 군사기술을 응용한 탓에 처음 이 기술이 쓰인 드빌은 수입 초기에 이 기능이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