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의 어머니는 ‘필요+경쟁’

[ 2018년 3월 5일에 오토엔뉴스를 통해 다음 자동차 섹션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뭔가 없거나 부족한 것 때문에 생기는 필요로부터 발명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수많은 발명이 대부분 필요한 것을 새로 만들거나 부족한 것을 개선하려는 데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발명에 늘 필요만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가 발명에 불을 당기고, 발명에 붙은 불에 경쟁이 부채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 사례는 자동차 업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최근 미국에서 출시된 새 차에 쓰인 기술 중 하나가 좋은 예다.

제너럴 모터스(GM)의 트럭 및 SUV 전문 브랜드인 GMC는 3월 1일에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픽업트럭 시에라의 완전 변경 모델을 공개했다. 시에라는 GMC 픽업트럭 라인업 중 가장 큰 모델로 쉐보레의 풀 사이즈 픽업인 실버라도의 형제차이기도 하다. 이번에 선보인 것은 6년 만에 달라진 4세대 모델로, 형제차인 쉐보레 실버라도에도 아직 쓰이지 않은 여러 새로운 기능과 특징을 갖췄다는 것이 GMC의 설명이다.

신형 시에라에서 특히 눈길을 끈 새 기능은 최상위 모델인 디낼리와 상위 모델인 SLT에 기본으로 들어가는 멀티프로(MultiPro) 테일게이트다. GMC는 이 기능을 ‘업계 최초, GMC 독점’이라며 강조하는데, 기능은 사소해보일 수 있지만 픽업트럭이라는 장르 특성을 염두에 두고 보면 꽤 혁신적임을 알 수 있다. 픽업트럭의 테일게이트는 대부분 문 아래쪽에 경첩이 있어 위쪽이 뒤를 향해 아래로 내려와 열리는 방식의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GMC의 멀티프로 테일게이트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방식으로 열린다. 

결정적 차이는 테일게이트 전체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도 열고 닫을 수 있는 설계에 있다. 테일게이트 위쪽에 따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U자 모양으로 분리한 부분을 더한 것이다. 시에라 정도 되는 픽업트럭은 덩치만큼 테일게이트도 크고 무겁기 마련이어서, 전동 조절 기능을 달더라도 짐을 싣고 내릴 때 여닫기가 번거롭다. 그리고 닫았을 때 턱이 상당히 높아서 작고 간단한 짐을 다루기에 불편하다. 그런 불편을 해소할 수 있도록 멀티프로 테일게이트는 단순히 여닫을 수 있는 데 그치지 않고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작지만 편리한 몇 가지 기능을 부여했다.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발판 기능을 하는 덮개를 안쪽에 단 것이다. 테일게이트를 2단계 모두 연 다음 안쪽 덮개를 펼치면 적재함에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진다. 이 덮개는 테일게이트 전체를 열었을 때에도 펼칠 수 있어, 적재함 길이보다 긴 물건을 실었을 때 뒤로 떨어지지 않게 막아주는 칸막이로도 활용할 수 있다. 테일게이트 윗부분만 따로 열리는 기능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윗부분만 열어 내리면 턱이 낮아져 노트북 컴퓨터나 공구상자 등을 놓고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간이 테이블처럼 쓸 수도 있고, 파이프나 각재 등 긴 물건을 비스듬히 실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닌 기능이지만, 픽업트럭 역사 100여 년 동안 테일게이트가 아주 단순한 문 역할만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히 혁신적인 기능이고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혁신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을까. 물론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필요라고 할 수 있다. 풀 사이즈 픽업트럭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탐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픽업트럭이 얻고 있는 높은 인기와 픽업트럭 분야의 맹주들이 벌이고 있는 치열한 경쟁이 발전을 부추긴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GMC 멀티프로 테일게이트가 다양한 기능을 품은 것은 경쟁 업체인 포드의 동급 모델인 F-시리즈 수퍼 듀티에 선택사항으로 추가할 수 있는 테일게이트 스텝(Tailgate Step)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8년에 등장한 포드의 테일게이트 스텝은 테일게이트 안쪽에 설치되는 수납식 간이 계단이다. 이것은 테일게이트를 연 다음 손잡이와 계단 부분을 꺼내어 쓰고, 일이 끝난 뒤 꺼낸 것들을 집어넣은 다음 테일게이트를 닫는 방식으로 쓰게 되어 있다. 이 기능 역시 GMC 멀티프로 테일게이트처럼 풀 사이즈 픽업트럭의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그동안 소비자에게 꾸준히 좋은 평을 얻어 왔다. GMC의 대응이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한층 더 발전된 기술과 기능을 담게 된 것은 경쟁에서 비교우위에 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는 경쟁이 만들어낸 긍정적 결과다.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자. 국내 시장에서 유일하게 판매되는 픽업트럭인 쌍용 렉스턴 스포츠도 거주공간을 빼면 기능 면에서 이전의 무쏘 스포츠나 액티언/코란도 스포츠와 별 차이가 없다. 픽업트럭보다 훨씬 더 판매량이 많은 소형 트럭 시장은 어떤가? 시장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는 현대 포터와 기아 봉고III도 그렇고, 국내 유일의 경상용차인 한국지엠 라보는 모델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적재함은 물론이고 실내에서도 획기적 변화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모두 과점 또는 독점 모델이기 때문이다. 

트럭의 예를 들었지만, 자동차 시장에서 브랜드나 차급, 특정 장르나 모델에서 과점이나 독점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술은 정체되고, 소비자의 이익보다 제조업체의 이익이 우선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러 이유로 국내 시장의 브랜드/모델 쏠림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정 모델이나 장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점과 독점이 더 폭넓게 이루어진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경쟁이 없다면 소비자가 필요한 것이 있어도 개선이나 발전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래서 발명의 어머니는 필요뿐 아니라 경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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