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1974년 – 50년 전의 자동차 세상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4년은 20세기 후반 자동차 역사 격동기의 한가운데였습니다. 우선 1973년 10월에 있었던 4차 중동전과 그 영향으로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수출을 제한하며 생긴 이른바 석유파동이 세계 경제를 본격적으로 뒤흔들기 시작했죠. 그 덕분에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이었던 미국에서는 경제적인 차들의 수요가 늘었고, 그 덕분에 일본차를 비롯해 수입차가 시장 몫을 빠르게 키웠습니다. 그 덕분에 1960년대 이후 빠르게 성장하던 일본 자동차 산업이 세계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커질 수 있었죠.

1974 토요타 코롤라

또한, 경제성이 차 고르기의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소형차 경쟁도 치열해집니다. 지역 특성상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동차 대중화와 더불어 소형차가 인기 있었던 유럽은 물론이고, 뒤늦게 자동차 보급이 시작된 일본도 상품과 가격 경쟁력이 높은 소형차의 수출에 힘을 싣고 있었죠. 그 덕분에 1960년대 후반부터는 주요 자동차 시장에서 소형차 영역에서의 경쟁이 이전과는 다른 수준으로 치열해집니다. 그러다가 석유파동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 자동차 업체들이 서둘러 소형차를 내놓기 위해 유럽 및 일본 자동차 업체들과 손을 잡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입니다.

그래서 1970년대 초반에는 그와 같은 협력 관계의 산물들이 하나둘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하죠. 당장 지금은 남남이지만 30년 남짓 이어진 포드와 마즈다의 제휴 관계가 시작된 것이 1974년이었고, 1972년에 제너럴 모터스(GM)와 제휴 관계를 맺은 이스즈가 처음으로 GM의 월드카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만든 승용차인 1세대 제미니가 시장에 나온 것도 1974년의 일입니다.

1세대 이스즈 제미니

유럽에서는 나라와 업체에 따라 명암이 엇갈렸습니다. 내수 시장 성장과 더불어 미국을 중심으로 수출이 잘 되면서 독일 자동차 업체들은 탄탄하게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내수 위주로 운영되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아프리카, 남미, 동유럽 등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큰 이익을 기대할 정도는 아니었죠. 가장 분위기가 나빴던 곳은 영국이었습니다. 산업 정책의 실패와 방만한 경영, 사회적 분위기 등의 영향으로 1960년대 이후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던 영국 자동차 업계는 그나마 규모가 어느 정도 되던 업체들이 흡수와 합병을 거듭해 만들어진 브리티시 레이랜드(BL)마저도 경영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1974년에 국유화되기에 이릅니다.

물론 영국뿐 아니라 다른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경영과 생산의 합리화와 현대화에 실패하고 충분한 생산능력과 제품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업체들의 주인이 바뀌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석유파동이 그런 흐름을 더 확실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프랑스에서 파산한 시트로엥이 푸조에 넘어가고, 이탈리아에서는 람보르기니 창업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회사에서 손을 뗀 일들도 모두 1974년에 있었습니다. 아울러 그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교훈을 얻은 자동차 업체들이 생존을 위해 이전보다 더 복잡하면서 긴밀한 국제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시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1974 폭스바겐 골프

그리고 그와 같은 산업 환경 변화는 석유파동과 맞물려, 일체형 차체 구조 즉 모노코크 구조와 앞 엔진 앞바퀴굴림 구동계 구조가 승용차의 대세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산 공정의 간소화와 자동화를 통해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차 크기에 비해 실내 공간을 넓게 확보할 수 있으면서 무게도 줄일 수 있어 경제성과 상품성을 모두 만족할 수 있었으니까요. 오랫동안 공랭식 엔진과 뒤 엔진 뒷바퀴굴림 구동계 배치를 고집했던 폭스바겐이 수랭식 엔진에 앞 엔진 앞바퀴굴림 설계로 대전환한 골프와 시로코가 대표적이죠. 두 차 모두 1974년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동차 보급이 크게 늘어난 선진국을 중심으로, 자동차 배출가스 때문에 생기는 대기오염을 줄일 수 있도록 각종 규제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전자식 연료분사 기술이었습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시험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던 전자식 연료분사 기술은 1970년대 초부터 점점 더 많은 차들에 쓰이기 시작하는데요. 1970년대 초반에 보쉬가 내놓은 제트로닉(Jetronic) 기술이 적당한 가격에 효과적으로 배출가스를 제어할 수 있어서, 당시 널리 쓰이고 있던 기계식 연료분사 장치인 카뷰레터를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GM이 1974년부터 쓰기 시작한 배출가스 촉매 변환기

비슷한 이유로 등장한 기술 중에는 흔히 ‘촉매’라고 부르는 배출가스 촉매 변환기가 있습니다. 가솔린 엔진에서 나오는 배출가스에서 유해성이 높은 일산화탄소(CO)와 탄화수소(HC), 질소산화물(NOX)을 화학작용을 통해 상대적으로 덜 유해한 이산화탄소(CO2)와 물(H2O), 질소(N2)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장치입니다. 시판되는 차에 이 촉매를 달도록 가장 먼저 제도화한 곳은 미국이었는데요. 1974년에 미국 시장에 1975년형으로 출시되는 새차부터 단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이 촉매와 더불어 자동차에 본격적으로 배출가스 정화 장치가 달리기 시작한 거죠.

사실 촉매와 전자식 연료분사 기술 사이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촉매가 효과적으로 제 역할을 하려면 배출가스 속 유해 성분이 촉매에서 화학작용이 일어나기 알맞을 정도를 유지해야 하는데요. 그러려면 연료가 이상적으로 탈 수 있는 조건 즉 완전연소가 이루어질 수 있는 상태로 엔진이 작동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완전연소가 일어날 수 있는 공기와 연료의 비율을 가리켜 이론공연비라고 하는데요. 과거에 널리 쓰이던 카뷰레터로는 이론공연비에 맞춰 엔진으로 들어가는 공기량에 알맞게 연료량을 정확하게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엔진의 연소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알맞게 연료량을 조절하기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자식 연료분사 장치가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무연휘발유 사용 안내 스티커

그리고 촉매는 자동차의 중요한 연료 중 하나인 가솔린 즉 휘발유의 성분을 바꾸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흔히 노킹이라고 하는 이상연소 현상을 줄이기 위해 휘발유에 납 성분을 넣었는데요. 납은 그 자체도 인체에 해롭지만, 엔진에서 연료가 타고 나오는 뜨거운 배출가스에 섞여 있는 납이 촉매 표면에 달라붙어 촉매의 성능을 떨어뜨리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에 촉매를 설치하면서부터 휘발유에서 납 성분을 없앤 무연 휘발유가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연 휘발유 공급과 사용이 의무화된 것도 미국이 가장 먼저였는데요. 그것 역시 1974년의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자동차 시장은 수요보다는 공급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정부 역시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목표 아래 산업 차원에서 국산화와 수출이라는 정책 방향에 맞춰 자동차 업계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자동차 업체 입장에서는 외국 제휴 업체들의 간섭에 시달리면서 정부 정책도 따라야 하고, 그러면서 소비자의 요구에도 맞춰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죠. 그래서 자동차 업체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휴 업체들로부터 부품을 받아다가 조립하는 조립생산하는 단계에서 여러 부품을 국내에서 생산해 차를 만드는 단계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석유파동까지 만났으니 그야말로 우여곡절의 시기였던 셈입니다.

현대 포니 쿠페 콘셉트

1970년대 초반까지 국내 최대의 자동차 업체였던 신진자동차는 협력 상대였던 토요타와 결별하고 제너럴 모터스(GM)와 손을 잡아 설립한 지엠코리아가 여러 모델을 만들어 팔고 있었고, 1974년에는 따로 신진지프자동차를 만들어 사륜구동차 시장을 독점합니다. 업계 후발주자였던 현대자동차는 포드 차들을 조립 생산하다가 마찰이 생기면서 독자 노선을 추진하고 있었죠. 자전거 생산으로 시작한 기아는 마즈다와 협력해 삼륜차에 이어 자동차 생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아는 1974년 10월부터 첫 승용차인 브리사 생산을 시작했고, 현대는 1974년 10월에 토리노 모터쇼에서 콘셉트카 포니 쿠페와 양산 예정인 포니의 시제품을 공개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시기임을 알 수 있는 새마을트럭이 지엠코리아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시장 규모는 아직 충분히 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업체가 생산한 승용차는 1973년에 1만 3,000여 대에 불과했고, 석유파동에 타격을 입은 1974년에는 1만 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승용차는 사치품이어서 세금도 비쌌고, 승용차 소비는 개인보다는 택시업체를 비롯한 법인에 집중되었습니다. 다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 즈음부터 선택할 수 있는 차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즉 우리나라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아주 작았지만, 나름의 격동과 부침을 겪으며 도약을 고민하던 시기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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