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월간 ‘자동차생활’ 2008년 1월호 ‘자동차 만담’에 실린 글입니다 ]
포드가 영화 ‘불릿’ 개봉 40주년을 기념해 머스탱 특별 한정모델을 생산한다. 40년 전의 영화 속에 나온 차를 소재로 새로운 상품이 나오는 것은 문화의 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문화가 성숙되어 많은 사람이 향유할 때 자연스럽게 산업으로 발전하는 것이 문화산업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을 영화 ‘불릿’과 머스탱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결혼하면서 여러 가지 신혼살림들이 들어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42인치 PDP TV와 홈시어터다. 그전에도 게임기를 DVD 플레이어 대용으로 쓰기는 했지만, DVD 영화를 보고 듣는 즐거움은 아무래도 전문기기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을 떠올리며 새 부대에 담을 새 술이라 할 DVD 타이틀도 몇 개 새로 구입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1968년에 나온 영화 ‘불릿’(Bullitt)이다. 1980년에 세상을 뜬 배우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주연을 맡았으니, 필자보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영화는 물론 이 영화의 존재조차도 모를 사람들이 제법 많으리라. 필자도 어린 시절 TV에서 이 영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지 않았다면 스티브 맥퀸이나 이 영화에 대해 최근 들어서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스토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침묵의 증인’(Mute Witness)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명망 높은 상원의원이 마피아 조직범죄의 증인보호를 형사 불릿(스티브 맥퀸)에게 맡기는데,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증인이 의문의 살해를 당한다. 증인확보에 몸이 달아오른 상원의원은 그에게 여러 압박을 가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한 불릿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내용이다. 쟁쟁한 배우들이 연기력을 한껏 발휘해, 촌스러운 옛날 분위기만 아니라면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꽤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 추격장면이 일품인 영화 ‘불릿’
그러나 이 영화는 자동차 매니아의 관점으로 볼 때 더 의미가 있고 재미있다. 중반에 등장하는 자동차 추격장면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주변의 공공도로를 무대로 펼쳐지는 7분 남짓한 추격장면은 매우 현실적인 감각의 촬영이 돋보인다.
이 장면은 여러 영화 또는 자동차 매체에서 자동차와 관련된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곤 한다. ‘영화 속 자동차 액션의 역사를 바꾼 장면’이라는 평가와 함께 말이다. 2005년 영국의 그라나다 TV가 시청자 5,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선정한 ‘최고의 자동차 추격장면’에서도 영화 팬들은 ‘식스티 세컨즈’(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오는 2000년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1974년에 나온 오리지널), ‘프렌치 커넥션’(1971), ‘로닌’(1998), ‘이탤리언 잡’(역시 마크 월버그 주연의 2003년 리메이크가 아닌 1969년에 나온 오리지널)을 제치고 ‘불릿’의 추격장면이 1위에 올랐다.
이런 극찬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차종의 선택에서 장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물씬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자동차의 고속주행 장면은 대부분 저속촬영으로 평범하게 달리는 차를 찍어 정상속도로 재생시킴으로써 빨리 달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을 썼다. 안전이나 제작여건, 기술상의 이유에서였다. ‘불릿’은 달랐다. 이 영화에서는 실제로 차를 빨리 몰면서 촬영했다. 특수효과도, 특별한 장치도 달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를 카메라는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박진감 넘치는 차의 주행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때 가장 멋지다는 것을 이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수시로 운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면을 넣어 관객이 차를 직접 모는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한 것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빠져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게다가 추격전에 쓰인 차들도 영화 촬영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카들이다. 주인공 불릿 역의 스티브 맥퀸은 포드 머스탱을 몰고, ‘히트맨’(hitman)이라 불리는 청부살인 전문가 두 명이 타고 추격전을 벌이는 상대편 차로는 닷지 차저가 나온다.
그리고 많은 장면에서 스티브 맥퀸은 직접 차를 몰았고, 닷지 차저는 스턴트 드라이버 빌 힉맨(Bill Hickman)이 몰았다. 빌 힉맨은 이후 영화 ‘프렌치 커넥션’(French Connection, 1973)에서도 멋진 스턴트 드라이빙을 펼친 전설적인 인물이다. 또한 고속주행 장면을 찍기 위한 촬영용 차로는 시보레 콜벳을 개조해 썼다고 한다. 실제로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광으로 알려진 스티브 맥퀸이 이 추격장면에 현실감을 불어넣기 위해 감독 이상으로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은 DVD의 서플먼트로 들어 있는 제작과정에도 잘 나와 있다.
40년 된 영화가 새 상품을 낳는 ‘문화의 힘’
요즘에도 간혹 자동차 영화를 표방하고 나오는 영화들이 있다. 그러나 너무 자동차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스토리가 허황되거나 구성이 엉성해 차 자체 말고는 볼 것이 없어 오히려 기억에 남지 않는 것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군계일학 격으로 탄탄한 스토리 구성와 연출을 바탕으로 자동차 추격장면이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녹아들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들도 있다.
앞서 ‘최고의 자동차 추격장면’으로 꼽힌 영화들 가운데에도 포함되었던 고(故)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로닌’이라든지, 더그 라이먼/폴 그린그래스가 감독하고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은 ‘본’(Bourne) 3부작 등의 추격장면도 트릭이 없으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이 일품인 영화들이다. 이처럼 현실감을 극대화한 자동차 액션의 뿌리는 역시 ‘불릿’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멋진 영화가 나온 지 벌써 40년. 이 고전 명작의 주인공 중 하나인 머스탱의 산실 포드는 ‘불릿’ 개봉 40주년인 올해를 기념해 ‘불릿 머스탱’을 특별 한정생산한다. 이미 2001년에 같은 컨셉트의 한정 모델이 나온 바 있지만, 레트로 스타일로 초대 머스탱의 분위기를 살린 현재의 머스탱이 영화 속 차의 느낌을 살리기에는 더 훌륭한 소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40년 전에 만든 영화가 아직까지도 새로운 상품을 만들 정도의 영향력을 갖는 것은 문화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잘 만든 영화, 차를 아는 사람이 차의 가장 멋진 모습을 그려낸 영화는 자동차 매니아들을 열광케할 뿐 아니라 차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차를 통한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주연 배우마저 세상을 떠난 40년 전의 영화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낼 만한 파급효과를 남긴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문화산업이라는 말을 산업적 관점에서 문화를 활용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문화산업은 문화가 성숙되어 많은 사람이 향유할 때 자연스럽게 산업으로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자동차 문화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40년 전의 영화 ‘불릿’은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