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 Daewoo Veritas 2008

[ 오토카 한국판 2008년 10월호에 쓴 글입니다 ]

지난달 GM대우가 베리타스의 판매를 시작하면서 국내 대형 세단 시장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올 초 출시된 쌍용의 새 모델 체어맨 W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대형 세단 전쟁은 조만간 현대의 신차(프로젝트명 VI)가 나오면 그 열기를 더할 것이다. 어느 시장이나 고급차에 대한 수요는 있기 마련이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일찌감치 1970년대 초 신진 크라운과 현대 포드 20M의 대결로 시작된 국내 대형 세단 전쟁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많은 승자와 패자를 남기며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대략 대여섯 차례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대형 세단 전쟁에서 가장 팽팽한 대결이 펼쳐진 것은 쌍용 체어맨과 현대 에쿠스 사이에 펼쳐진 한판 승부가 아니었나 싶다. 1986년 속칭 ‘각 그랜저’로 잘 알려진 1세대 모델 이후 현대는 국내 대형 세단 시장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여기에 기아와 대우가 여러 차례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언제나 승리의 여신은 현대 편이었다. 쌍용이 체어맨을 내놓고, 현대가 에쿠스를 내놓기 전까지는 말이다.

체어맨은 에쿠스보다 먼저 나왔지만,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에쿠스가 나온 뒤의 일이다. 에쿠스는 그랜저와 다이너스티의 뒤를 이어 만년 1위를 차지하리라 여겨진 차였다. 현대차의 최신 기술이 모두 담긴 차였고, 값도 국산차 가운데 가장 비싼 수준이었다. 상대적으로 오래된 벤츠 설계와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체어맨은 얼핏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쿠스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에쿠스가 초기에 한참 구설수에 오르내리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기 및 전자장치의 오작동과 고장, 미쓰비시 설계의 GDI(휘발유 직접분사) 엔진의 배기가스 문제 등 적지 않은 골칫거리들이 현대를 괴롭혔다. 현대는 별도의 처리조직을 구성하고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에쿠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체어맨은 이미 검증된 설계 및 기술과 벤츠 이미지를 등에 업고 꾸준히 팔려나갔다. 때때로 체어맨의 판매는 에쿠스를 뛰어넘기까지 했다. 에쿠스의 품질이 안정화될 때까지 체어맨은 늘 에쿠스를 위협하는 ‘강한 약자’였다.

국내 메이커의 대형 세단을 사야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해야 하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지극히 보수적인 사회적 성향을 지니고, 차에 대한 평가 역시 보수적인 관점에서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수입 대형 세단을 구입하는 사람들과는 성향이 다른 소비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급적 무난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존재감이 있어야 한다. 체어맨은 그런 점에서 뛰어나지는 않아도 갖춰야 할 요소들은 모두 갖추고 있었던 덕분에 나름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오랜만에 국내 소비자들은 국내 브랜드 대형 세단들이 펼치는, 제대로 된 4파전을 보게 되었다. 그것도 네 모델 모두 새로운 플랫폼과 설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진짜 새차들이고, 이전에 내놓았던 모델들의 단점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신선한 경쟁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앞으로 펼쳐질 경쟁이 정말 신선하고 팽팽하게 전개될까? 상품성과 기술력으로는 누구도 절대적 우위를 자랑할 수 없지만, 제품 자체만 놓고 차를 구입할 소비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은 몇몇 메이커의 개발자들을 우울하게 할 것이다. 게다가 잘 만든 차, 잘 팔리면야 좋겠지만, 세계적인 금융위기다, 불황이다, 실물경기 위축이다 하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마당에 이런 차들이 잘 팔린다고 하면 왠지 썩 환영받지는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경제난으로 작은 차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세계적 흐름인데다, 연료소비가 많은 대형 세단들은 유해 배기가스 배출량도 많은 ‘덜 친환경적인 차’들 아닌가.

충분히 재미있을 경쟁이지만, 그 재미를 느끼기에는 너무 시절이 좋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 모든 일은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