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카 201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자동차에서 특정한 부품이나 장치를 가리키는 용어들 가운데에는 외국에서 쓰는(주로 영어) 말을 그대로 쓰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말(주로 한자어)로 바꾸어 쓰는 것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분명 한글로 쓰여 있는 데도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용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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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례 중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차체자세제어장치’라는 것이 있다. 영어로 ESC(Electronic Stability Control), ESP(Electronic Stability Program), VDC(Vehicle Dynamics Control) 등으로 쓰이는 것의 우리말 이름이다. 기능적 관점에서 보면 차가 달리는 중의 주행안정성과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고, 영어 표현에는 장치의 이런 특징이 비교적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차체자세제어장치’라는 말에는 장치가 작동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만 드러나 있다. 차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말에서 주행안전과 관련된 장치임을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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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 주차보조 시스템’은 그나마 조금 나은 표현이긴 하지만 이것도 장치 특성과 기능을 잘 반영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장애물을 감지해 경고해 주는 장치를 말하는 것일까? 차내 모니터에 차체 뒤쪽의 영상과 차체 회전 및 이동방향 안내 선이 그려지는 것일까? 스티어링 휠에서 손을 떼고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 페달만 조작해서 후방 주차를 손쉽게 할 수 있는 장치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본 용어 가운데에는 ‘진폭 감응형 댐퍼’와 ‘압력 감응형 댐퍼’라는 것들도 있다. 댐퍼(damper)가 쇼크 업소버(shock absorber)와 같은 기능을 하는 장치임을 모르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단 그렇다고 치자. 메이커 보도자료와 홍보자료를 보면, 진폭 감응형과 압력 감응형 댐퍼는 모두 ‘주행 시 도로 여건에 따라 서스펜션 댐퍼의 감쇠력을 부드럽거나 딱딱하게 자동조절하여 승차감 및 조종안정성을 높여주는’ 댐퍼다. 그리고 압력 감응형 댐퍼는 진폭 감응형 댐퍼에 비해 오일 흐름을 제어하는 밸브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이도록 ‘개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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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특성이나 차이를 표현하는 단어를 소비자들이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댐퍼들이 감응하는 ‘진폭’과 ‘압력’의 실체를 꼭 소비자들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이런 용어들을 보도자료나 브로슈어에 내세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엔지니어들은 주로 영어로 된 표현을 쓸테고,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할 영업사원들도 이런 내용을 구구절절이 설명할 일은 별로 없을 텐데 굳이 이런 용어를 만든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감응(感應)’이라는 말도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기계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어울릴 말은 아니다.

외국어로 된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쓰는 이유는 한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말로 바꾸었는데도 이해가 힘들다면 그것은 제대로 만든 용어가 아니다. 외국 용어를 우리 여건에 맞게 바꾸는 일은 결코 간단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가 아니면 굳이 차이를 구분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용어를 버젓이 소비자들에게 제시하는 태도는 결코 친절한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요구하기 전에 먼저 친절을 베푸는 기업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