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non, Ball, and Run

[ 모터트렌드 한국판 2010년 7월호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하루하루가 바쁜 일상이다. 아침나절 출근해서 밤늦도록 일하고, 퇴근해서도 새벽까지 키보드와의 싸움을 이어가는 나날의 반복. 좀처럼 쉴 짬이 나지 않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 나가더라도, 가뜩이나 굳어 있는 머리를 조금이라도 돌아가게 하려면 어느 순간에는 쉼표를 한 번 찍어 줘야 한다. 때마침 모터트렌드에서 지령이 내려왔다. 야구장에 가란다. 야구는 둘째 치고, 88 서울올림픽 이후로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직접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야구장에 가란다. 

음. 그래? 이놈의 머리는 일탈을 무척 좋아한다. 까짓 거 머리도 식힐 겸 한 번 가보지 뭐. 꼭 야구장에 가야 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억지로라도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아닌가. 어차피 많은 시간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인천 문학 야구장으로 정해진 목적지도 달갑기 그지없다.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기에 딱 알맞은 조건이다. 모르긴 해도 올 여름, 일에 치어 가족과 함께 거한 휴가여행을 떠나기 부담스러운 가장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잠깐이나마 이런 나만의 여유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듯하다.

그래도 야구 문외한이 심드렁해할 수도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는지, 모터트렌드는 당근도 함께 던진다. 갔다 오는 길은 스바루 레가시와 함께 하란다. 차 좋아하는 사람들이 환장하는 WRC(세계 랠리 선수권)에서 스바루의 이름을 드높인 차로는 임프레자가 유명하지만, 임프레자의 성공에 밑거름이 된 것은 그에 앞서 투입되었던 레가시였다. 그 시절 레가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화했지만, 랠리 스타 스바루의 본령(本領)으로 ‘잘 달리는 차’의 이미지가 강한 레가시는 낯선 세상으로의 발걸음에 당근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일산 신도시에 있는 사무실에서 인천 문학 야구장까지의 거리는 40km가 채 되지 않는다.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는다면 1시간 내에 충분히 닿을 수 있다. 저녁 6시 30분으로 예정된 경기 시작까지는 여유가 있지만 괜히 마음이 급하다. 레가시의 달리기 실력이 궁금해서다. 조심스레 시가지를 빠져 나가는 동안 의외의 덤덤함이 잔잔한 당혹감을 부른다. 레가시가 원래 이렇게 무난하고 편한 차였나? 하기야 미국 시장에서 도요타 캠리나 혼다 어코드 같은 차들과 함께 팔려면 가급적 개성을 묻어 놓는 것이 도움은 되겠지. 적당히 넉넉한 공간에  담백한 꾸밈새, 사이드 미러의 풍절음을 빼면 조용한 실내는 별다른 감흥이 주지 않아 입이 절로 다물어진다.

그런데 고속도로에 오르니 다른 쪽에서 입질이 온다. 수평대향 3.6L 엔진은 두툼한 토크를 내며 시원스럽게 차를 밀어 붙이고, 회전수를 아무리 높여도 기분 좋은 소리만 낸다. 가속력이 폭발적이지는 않아도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느낌이 꽤 괜찮다. 속도를 한껏 높여 요리조리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갈 때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넉넉한 승차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몸놀림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무게감이 꾸준한 스티어링 반응과 빠르게 반응하는 AWD 덕분에 고속주행 때에도 레일 위를 달리듯 마음 놓고 차선을 바꿀 수 있다. 여기에 세련되게 조율된 브레이크도 든든함을 더한다. 어느 정도 여유 있는 크기에 폭신한 느낌을 주는 시트는 오래 몰아도 몸이 편할 듯하다. 작지 않은 덩치가 마치 대포알처럼 고속도로 위를 날아다닌다. 이런 건 GT카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레가시가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좀 더 빼서 더 먼 곳에 있는 야구장을 가겠다고 할 걸.

40여 분을 신나게 달려 도착한 인천 문학 야구장. 시즌 1위를 달리고 있는 SK 와이번스의 홈 구장인 이곳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원정 팀인 삼성 라이온스와의 대결이다. 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잔디밭은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평일 경기라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경기 1시간을 앞둔 무렵부터 들기 시작한 관중들은 경기 시작 무렵에는 내야쪽 관중석을 거의 다 채울 정도로 불어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맑은 초여름 날씨지만 그늘진 관중석은 선선하기만 하다. 물색 모르고 원정 팀 쪽 좌석을 골라 앉고 나니 건너편 SK 팬들의 응원 열기가 만만찮다. 전광판에 간간이 비치는 SK 응원단의 신나는 모습에 미리 분위기 파악을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경기가 시작되고, 간간이 TV로만 보아왔던 공과 방망이의 불꽃 튀기는 대화가 바로 코앞에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넓은 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웬만큼 집중하지 않으면 경기 진행을 파악하기 어렵다. 투수가 던지는 공의 속도감, 타자가 휘두른 배트에 맞은 공이 날아갈 때의 힘이 느껴지는 것이 놀랍고, 수시로 관중석으로 날아드는 공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선수들의 힘과 기가 점점 더 경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어스름이 깔리며 켜지는 조명은 더더욱 경기장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을 자아낸다. 주변 사람들처럼 테이블 위에 각종 음식들을 늘어놓고 먹고 마시면서 경기를 즐길 정도의 여유를 찾으려면 야구장 깨나 들락거려야겠다.

1위 팀과 3위 팀 사이의 경기답지 않게 조금 지루하게 진행된 경기는 시작한 지 3시간을 훨씬 넘긴 밤 9시 50분에 겨우 마무리 된다. 경기 결과는 2회말 홈런으로 1득점을 올린 홈 팀 SK가 몇 차례 수비실책으로 후반 구원투수들이 호투한 삼성에게 6점을 내주고 패전했다. 관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SK 팬은 아쉽긴 해도 대부분 웃는 모습으로 경기장을 빠져 나간다. 그저 야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뜻이리라. 딱히 응원하는 팀이 없었기에 지루함이 조금 더했을 뿐, 어느 한쪽을 응원했다면 경기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게 야구의 재미와 현장관람의 매력이었구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시 레가시에 올라 집으로 향하는 길.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동안 불과 몇 십분 전까지의 경험이 남긴 시원한 여운이 이어진다. 이미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원함을 매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처음 접해보는 나조차도 ‘이번 기회에 야구에 좀 더 관심을 가져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며칠은 야구 생각에 즐거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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