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Maserati_GranTurismo_S-1

[ 모터트렌드 2010년 9월호 그랜드 투어링 특집에 실린 글입니다. ]

이번에 그랜드 투어링에 나선 차들 가운데 대놓고 GT임을 표방하는 유일한 차가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다. 이름부터 이태리어로 그랜드 투어링을 뜻하는 그란투리스모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아마도 이 차를 몰아보면 현대적인 GT가 갖춰야 할 덕목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란투리스모를 자세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까이 두고 천천히 둘러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차체가 훨씬 크다. 화살처럼 뾰족한 차체와 찢어진 눈매의 램프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듯한 공기흡입구가 빚어내는 존재감은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페라리의 화려함과는 차원이 다른 자극적인 디자인에서 왠지 사악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묵직한 도어를 열면 화려한 실내가 기다린다. 거의 실내 전체를 휘감은 가죽의 질감은 평범한 차들과는 격이 다른 고급차임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색다른 스위치류 배치나 속도계와 엔진 회전계가 멀리 떨어진 계기판은 살짝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넉넉한 공간에 몸을 잘 받치면서 편한 느낌을 잃지 않는 운전석에 일단 앉고 나면 자연스럽게 운전에 집중하고픈 욕구가 솟는다.

전방 시야는 매우 뛰어나다. 적당한 높이의 숄더 라인도 차선 변경이나 추월 때 시원하게 공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고속 질주를 위한 기본적인 환경은 제대로 갖추었다. 센터 터널이 높아 스포티한 느낌으로 기어 노브를 조작할 수 있는 것도 반갑다. 위 아래로 좁은 센터 페시아의 스위치들이 모두 작은 이유는 운전에 집중하라는 뜻일 것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뒷좌석도 어른 두 명이 그럭저럭 자리를 잡기에 충분해 보이지만, 두 명 분 짐을 싣기에 살짝 빠듯한 짐 공간이 아쉽기는 하다. 뒷좌석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짐 공간을 키우는 것이 옳았을까?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명쾌한 스타일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타기에 충분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뒷좌석은 대단히 넉넉한(그리고 짐을 싣기에는 너무나 고급스러운) 짐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동을 거는 순간, 겉모습에서 느꼈던 사악함은 자극적인 배기음으로 바뀌어 운전자를 부추긴다. 익숙한 방식의 기어 레버는 부담 없이 차를 몰 수 있게 한다. F1 스타일의 수동기반 자동변속기가 리어 액슬에 붙어 있는 일반 그란투리스모 S와 달리 이 차에는 전통적인 토크 컨버터 방식 ZF제 6단 자동변속기가 엔진 바로 뒤에 달려 있다. 저속에서 다루기 편리한 변속기는 속도를 붙여도 매력을 잃지 않는다. 위 아래로 길게 뻗은 스티어링 휠 뒤의 변속 패들은 ‘찰칵’거리는 금속성 조작감이 가볍게도 느껴지만 조작할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수동 모드에서의 변속은 전통적인 자동변속기로서는 대단히 빠르고 매끄럽다. 물론 자동 모드로 내버려둬도 차는 충분히 시원하고 즐겁게 눈앞에 펼쳐진 도로를 집어삼킨다.

센터 페시아 왼쪽 위의 ‘SPORT’ 버튼을 누르면 차는 한층 박력 있는 면모를 드러낸다. 3,000rpm을 넘기면 발악하듯 울부짖는 엔진소리, 탄탄해지는 승차감, 묵직해지는 스티어링 휠은 본격적인 와인딩 코스에 어울릴 세팅이다. 전방이나 코너를 파고드는 느낌은 한층 공격적으로 변하지만 편안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교한 스티어링 반응에 뒤쪽 차체도 빠르게 대응한다. 연이은 코너에서도 타이어가 슬쩍슬쩍 미끄러지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없다. 다만 장거리를 이렇게 달리기에는 조금 피곤할 세팅이다. 그래도 맹수의 울부짖음을 연상시키는 배기음은 기가 막히다. 터널 안을 달릴 때에는 유리창을 열어 놓은 채이고 싶다.

그란투리스모가 정말로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은 스포츠 모드를 해제하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다. 고속주행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어느 정도 선까지는 속도를 계속 높여도 저속으로 달릴 때만큼 편하다. V8 4.7L 엔진이 뿜어내는 440마력의 힘은 언제든 부담 없이 시원한 가속감을 이끌어낸다. 1.8톤의 덩치는 잊게 되고 긴 휠베이스가 빚어내는 안정감만이 고스란히 남는다. 게다가 부드럽지만 허술하지 않은 승차감은 풍요와 절제의 교차점을 잘 찾아낸 느낌이다.

박규철 위원은 마세라티 GT의 강렬함이 사라져 재미가 덜하다고 하지만, 편안함이라는 덕목에 충실한 그란투리스모 S 오토매틱은 내 기준으로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여유가 있으면 즐길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 가진 자의 여유를 한껏 풍미할 수 있는 이런 차야말로 진짜 GT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