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터 매거진 2011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2000년대 초중반에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이 내놓았던 컨셉트카들 가운데는 새로운 중흥을 기대하게 만드는 차들이 많았다. 미국 자동차 산업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양산차로 만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컨셉트카들을 돌아본다

Cadillac Sixteen / 캐딜락 식스틴

1930년대에 캐딜락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차를 만들었다. 양산차에 올라간 16기통 엔진은 캐딜락 이외의 다른 메이커 차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화려한 과거를 오늘에 되살려 캐딜락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시도는 2003년에 등장한 식스틴 컨셉트카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 식스틴은 GM의 ‘카 가이’ 밥 러츠의 아이디어에 한 시대를 풍미한 GM 디자인 책임자 웨인 체리의 능력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차였다. V8 엔진 두 개를 이어 만든 V16 엔진은 배기량만 13.6L였고, 1000마력의 최고출력에 1000lb·ft(138.3kg·m)의 최대토크를 내도록 계획되었다. 고전미가 담긴 현대적인 스타일의 차체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었지만 큰 차체로 무게가 2.4톤에 이르렀다. 실내는 4명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도록 구성했고, 투스카니 가죽 내장재, 실크 카페트, 보스 서라운드 오디오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Buick Velite / 뷰익 벨라이트

뷰익은 21세기에 접어들며 1950년대의 황금기를 회상하며 프리미엄 컨버터블에 대한 시도를 여러 차례 내놓았다. 1999년에 시에로 컨셉트카로 시작된 이러한 시도는 2001년의 벵갈 컨셉트카에 이어 2004년 뉴욕 오토쇼에서 공개한 벨라이트 컨셉트카로 발전했다. 스타일과 구성 면에서 벵갈의 연장으로 볼 수 있었던 벨라이트는 순수 컨셉트카였던 벵갈과 달리 양산 가능성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5세대 쉐보레 카마로의 바탕이 된 GM의 뒷바퀴굴림 제타 플랫폼을 기초로 제작되었고, 디자인은 GM 내부에서 담당했지만 제작은 이태리 카로체리아 베르토네가 했다. 세련된 차체에는 수직형 ‘폭포수’ 그릴과 펜더의 공기배출구 등 고전적인 디자인 요소들을 담았고, 정돈된 선과 면은 이후의 뷰익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incoln Continental / 링컨 컨티넨탈

링컨의 고급 모델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했던 컨티넨탈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낡은 차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이런 인식을 바꾸고 링컨을 한층 현대적인 럭셔리 브랜드로 새롭게 정의하려는 아이디어는 2002년 로스앤젤레스 오토쇼의 컨티넨탈 컨셉트카로 구체화되었다. 역대 컨티넨탈 중 가장 크고 웅장했던 1961년형 컨티넨탈의 특징과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은 당시 링컨 디자인 책임자인 게리 맥거번의 지휘로 빚어졌다. 직선 위주의 대담하고 강렬한 스타일에 1961년형 컨티넨탈에서 볼 수 있었던 캐비닛 도어의 하드톱을 갖춰 전통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위로 평행이동하는 트렁크 리드와 서랍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트렁크 같은 색다른 요소들은 현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좌우가 분리된 뒷좌석에는 개별 멀티 미디어 시스템도 갖췄다. 엔진은 당시 포드가 소유하고 있던 애스턴 마틴의 V12 6.0L 엔진을 가져왔다. 당대 링컨 디자인의 현실성을 감안하면 양산차에 반영해도 좋을 수준이었지만 양산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Ford Forty-Nine / 포드 포티나인

2001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등장한 포드 포티나인 컨셉트카는 디자인 면에서 호평을 얻은 1949년형 포드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차였다. 레트로 디자인이 크게 유행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당시의 포드는 포티나인 컨셉트카를 레트로 디자인이 과연 소비자에게 충분한 매력을 느끼게 할 지 점쳐보는 계기로 삼았다. 재규어와 링컨이 공유한 뒷바퀴굴림 플랫폼을 기본으로 제작되었고, V8 3.9L 엔진으로 뒷바퀴를 굴렸다. 쿠페와 컨버터블의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된 것도 특이했다. 쿠페는 지붕에서 트렁크 앞까지 이어지는 통유리가 눈길을 끌었다. 겉모습만큼이나 실내 디자인도 원작의 흐름을 충실히 반영했다. 넓은 실내는 매우 단순하게 구성했고, 시트 디자인도 옛 스타일을 그대로 살렸다. 디자인에 대한 반응은 좋았지만, 포드는 엉뚱하게도 이 디자인 대신 같은 플랫폼을 활용해 선더버드를 부활시키는 길을 선택했다. 

Chrysler Firepower / 크라이슬러 파이어파워

다임러와 크라이슬러가 한 지붕 아래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시절. 크라이슬러 브랜드의 입지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컨셉트카들은 사뭇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2004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등장한 ME 4-12 컨셉트카는 수퍼카의 영역을 넘보는 차로 혁신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스타일로 큰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는 한층 실현가능성이 높은 파이어파워 컨셉트카가 등장했다. 외부 디자인은 브라이언 닐랜더, 실내는 그렉 하웰이 맡았는데, 앞서 선보인 ME 4-12도 이들의 작품이었다. 파이어파워는 당시 크라이슬러의 디자인 흐름을 따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엔진만 V8 6.1L 헤미로 바뀌었을 뿐 닷지 바이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미 생산되고 있는 차의 기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양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크라이슬러는 럭셔리 스포츠카를 모델 라인업에 추가시킬 기회를 잃고 말았다.

Dodge Hornet / 닷지 호넷

여러 미국 브랜드들이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을 꾸준히 노렸지만 실현시키기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닷지 역시 유럽을 비롯한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고민을 꾸준히 해 왔다. 결국 소형차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닷지는 2006년에 유럽 B 세그먼트에 해당하는 해치백 컨셉트카를 선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닷지 호넷이었다. 막 유행하기 시작한 박스형 해치백으로 등장한 호넷은 닷지에게 있어 매우 필요한 차였지만 소형차 생산 경험이 없던 크라이슬러가 이를 양산하기는 쉽지 않았다. 파트너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지만 지지부진했고, 그러는 사이에 미국이 경제위기에 빠지면서 한동안 호넷의 양산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피아트가 크라이슬러 경영에 참여하면서 호넷 생산계획의 실현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Hummer HX / 허머 HX

거대한 몸집에 기름 먹는 하마로 취급받던 허머는 모델 라인업을 꾸준히 작은 차로 확대했다. 친환경성과 경제성이 낮다는 이미지를 벗어야 하는 것은 물론, 미국의 기업평균연비(CAFE)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GM은 H3 아랫급인 H4를 위한 컨셉트카로 HX를 2008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공개했다. 휠베이스가 2,616mm로 차체 길이는 소형차에 가까웠지만, 험로주행을 우선시한 설계로 차체 너비는 2m가 넘었다. 보디 스타일은 2도어 컨버터블로, 지붕과 펜더, 도어를 모두 떼어낼 수 있도록 해 짚 랭글러의 경쟁차종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엔진은 V6 3.6L로 휘발유나 E85 알콜 혼합연료를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양산 시 2.4L 엔진을 쓰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실제 양산되었다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만한 요소가 담겨 있었지만, 파산 위기에 처한 GM이 허머 브랜드 자체를 포기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