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루돌프 디젤의 생애

[ 2013년 8월, 대한항공 기내지 ‘Beyond’에 쓴 글입니다. ]

요즘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연료소비가 적은 디젤 엔진 승용차가 인기를 얻고 있다. 연료와 공기를 혼합한 안개와 같은 상태의 혼합기에 불꽃을 일으켜 폭발을 유도하는 휘발유 엔진과 달리, 디젤 엔진은 압축되어 뜨거워진 공기에 연료를 뿌릴 때 자연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는 원리를 이용한다. 적은 양의 연료만으로도 충분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이러한 특성 덕분에 디젤 엔진의 효율은 매우 높다.

자동차뿐 아니라 선박, 기차, 산업용 발전기 등 폭넓은 분야에 쓰이고 있는 것도 높은 효율에서 비롯되는 강력한 힘과 뛰어난 경제성 때문이다. 20세기에 걸쳐 세상의 모습을 바꾸어 놓은 대량생산과 대량수송은 디젤 엔진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놀라운 능력을 지닌 기계에 그것을 창조한 인물인 루돌프 디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쩌면 발명가에 대한 가장 합당한 대우일 것이다.

루돌프 디젤

루돌프 크리스티안 카를 디젤(Rudolf Christian Karl Diesel)은 1858년 3월 18일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테오도르와 어머니 엘리제는 모두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파리에서 만나 결혼한 사이였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어릴 때부터 빛을 발해서, 어린 시절에 이미 독일어와 프랑스어, 영어를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었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우등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10대로 접어들 무렵, 프랑스와 독일(당시에는 프러시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던 끝에 보불전쟁이 일어나면서 독일 출신의 디젤 가족은 10년 넘게 뿌리를 내렸던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때마침 테오도르의 고향인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 살고 있던 친척이 루돌프를 돌보기로 해, 그는 짧은 런던 생활을 뒤로하고 다시 독일로 향했다. 

수양아들로 친척들의 사랑을 받으며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학업을 계속하던 그는 14번째 생일에 자신의 꿈이 ‘기술자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직업학교와 공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1875년에 뮌헨 폴리테크닉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기계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은 카를 폰 린데(Carl von Linde)의 열역학 수업은 그의 일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열역학 수업을 들으며 열을 동력으로 바꾸는 과정에 대한 카르노(Sadi Carnot, 프랑스의 물리학자)의 이론에 사로잡힌 그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카르노 이론을 이상적으로 구현해 열효율이 뛰어난 새로운 엔진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한편 폰 린데의 눈에 띈 그는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스승의 추천으로 냉동기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얻은 제빙기 특허로 수입을 올리는 한편 미국에서 건너온 마사 플라시(Martha Flasche)와 결혼해 한동안 행복한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1895년 아우크스부르크 기계공작소 뉘른부르크 공장 전경 그림

프랑스에서의 일이 끝나고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를 한 루돌프는 꾸준히 카르노 이론에 매달려, 1892년에 ‘합리적인 열기관의 이론과 구조’라는 이름의 설계를 특허 신청해 1893년 2월에 등록이 완료되었다. 이 특허는 디젤 엔진의 토대가 된 이론을 담고 있었지만 실제 엔진을 만들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특허내용을 보고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아우크스부르크 기계공작소(Maschinenfabrik Augsburg, 산업설비 및 상용차 회사인 MAN의 전신)의 총수 하인리히 폰 부츠(Heinrich von Buz)는 루돌프를 선임 기술자로 채용하고 그의 특허가 실용화될 수 있도록 꾸준히 후원을 했다.

디젤 엔진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시험과 실패가 뒤따랐다. 1893년 여름에 있었던 첫 시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시험 결과를 통해 충분히 실제로 움직이는 엔진을 만들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매달렸던 이론의 오류를 깨닫고 다른 방법으로 엔진의 실용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설계변경과 개조가 이루어질 때마다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고, 그 때마다 또 다른 개선책을 찾아야 했다. 시험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문제와 해결이 반복되면서 디젤의 몸과 마음은 모두 지쳐갔다.

그러던 1896년의 마지막 날. 처음 만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시험용 엔진이 완성되었고, 드디어 그가 꿈꾸었던 뛰어난 효율의 엔진이 실현되었다. 이듬해 2월에 있었던 공인시험에서 그의 엔진은 당시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높은 효율을 내는 것을 입증했다. 루돌프 디젤은 그의 혁신적인 발명품과 함께 단숨에 스타 기술자가 되었다.

1897년에 만들어진 첫 디젤 엔진

놀라운 효율의 새로운 엔진이 등장하자 세계 각지의 회사들은 앞 다투어 그에게 특허료를 지불하고 디젤 엔진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순식간에 그는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취미와 문화생활을 즐기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사교계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이곳저곳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디젤 엔진은 문제가 많았다. 초기의 엔진은 대부분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하더라도 잦은 고장에 시달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특허와 실제 만들어진 엔진 사이의 설계상의 빈틈을 노리고 특허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나왔다. 

다행히도 세기가 바뀌면서 다른 기술자들의 노력으로 실용적인 디젤 엔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1900년 여름에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디젤 엔진은 그랑프리의 영예를 안았다. 오래지 않아 디젤 엔진은 뛰어난 효율을 입증하며 차츰 증기기관을 밀어내고 산업동력의 주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디젤 대란’ 속에서 그는 신경쇠약이 심해져 오랫동안 요양 생활을 하게 되었고, 잇따른 사업 실패와 특허 소송, 부동산 관련 소송은 그가 쌓아왔던 부를 모두 앗아가고 말았다. 기댈 곳조차 마땅치 않았던 그는 말년을 극심한 두통과 씨름해야 했다. 

디젤 엔진 발명 100주년 기념 우표 (독일)

1913년 9월, 디젤은 네덜란드 앤트워프를 출발해 영국 핼위치로 향하는 우편 증기선 드레스덴 호에 올랐다. 런던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디젤 엔진 회사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그의 방을 찾은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차가운 북해 위에서 세기의 발명가가 사라진 것이다. 며칠 뒤, 같은 항로를 지나던 네덜란드 상선이 물 위에 떠 있는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시신에서 나온 물건을 본 루돌프 디젤의 아들은 그 물건이 아버지의 것임을 확인했다. 많은 이들이 디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생각하지만, 의문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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