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매거진 2015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주로 외국 자동차 회사와 제휴를 맺고 승용차 생산을 재개했다. 그러나 토요타는 독자 기술로 경쟁력 있는 승용차인 크라운을 만들어 1955년에 첫선을 보였다. 3년 후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 실패했지만, 일본에서는 큰 인기를 얻고 이후 토요타의 대표 차종으로 자리를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 자동차 업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강제로 재편되는 한편 자동차 생산이 제한되었다. 승용차에 한해 부분적으로 생산이 허용된 1947년이 되어서야 일본 자동차 업계의 숨통이 트였다. 전쟁 중 자동차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 물론 물자 부족 등으로 이미 쓰이고 있던 차의 유지 관리도 어려운 상황이어서, 자동차 수요는 적지 않았다.

토요타와 닛산을 비롯한 여러 회사가 생산을 서둘렀지만, 충분한 기술과 생산능력을 갖춘 회사는 드물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각 회사가 외국 업체와 기술제휴를 통해 승용차를 생산하는 것을 추진했다. 그 결과 닛산은 영국 오스틴, 이스즈는 영국 루츠, 히노는 프랑스 르노, 미쓰비시는 미국 카이저와 제휴해 승용차 생산을 시작했다.

2차대전 후 독자 기술로 승용차 개발 나선 토요타

그러나 토요타는 이례적으로 독자 기술로 승용차를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토요타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승용차 생산에 뜻을 두고 있었고 1935년에 첫 승용차인 AA형을 독자 기술로  만든바 있었다. 이는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의 방침이기도 했다. 토요타는 전후 경영난으로 노사분규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한국전쟁 특수로 기사회생해 성장의 발판을 다질 수 있었다. 

우선 소형 트럭에 썼던 설계와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승용차를 만들어 판매했던 토요타는 시장 흐름을 바탕으로 1952년에 완전히 새로운 승용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차의 이름은 일찌감치 크라운으로 결정되었다. RS라는 개발명을 얻어 시작된 새 승용차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나카무라 겐야(中村健也)였다. 나카무라는 토요타가 독자적으로 만든 주사(主査)제도에 따라 첫 주사가 되었다. 주사는 프로젝트 관리자로, 자동차 설계부터 생산 단계까지 차종 개발작업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책임자다. 이때 만들어진 주사 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카무라의 지휘 아래, 신차 개발은 하나의 섀시를 활용해 승용과 상용 두 가지 모델을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은 승용차를 구매하려는 일반 소비자보다 택시 수요가 컸다. 토요타는 시장조사와 더불어 택시 업계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이유였다. 이는 도로 포장률도 낮고 유지보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일본 도로 여건을 반영한 것이었다.

섀시는 이전까지 내구성을 고려해 승용차에 트럭용 섀시를 활용했던 틀을 벗어나 승용차 전용 섀시를 새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기본적으로는 사다리꼴 프레임 위에 차체를 얹는 형태였고, 거친 도로 환경을 고려한 험로 주행 특성과 소형차 기준으로 넉넉한 실내 공간을 모두 갖추도록 설계되었다. 도어는 앞뒤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열리는 수어사이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개발 과정에서 택시와 상용차 수요를 고려해 별도의 모델도 만들어졌다. 세단 형태의 마스터, 밴과 픽업 트럭인 마스터라인이 그것이었다. 승용차 버전인 크라운에는 앞쪽이 더블 위시본 방식, 뒤쪽이 리지드 액슬 방식이었다. 앞쪽만 해당되지만 일본 승용차 처음으로 독립 서스펜션이 쓰인 것은 화제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반면 마스터와 마스터라인은 앞뒤 모두 리지드 액슬 방식이었고 스프링도 크라운보다 강화된 것을 썼다. 상용차의 가혹한 주행환경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엔진은 앞서 출시한 토요페트 슈퍼에 썼던 것을 활용했다. OHV 구조의 직렬 4기통 1.5리터 엔진은 48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변속기는 컬럼 시프트 방식으로 조작하는 3단 수동으로, 당시 일본차로는 드물게 2단과 3단에 싱크로나이저가 쓰였다. 엔진과 변속기는 크라운과 마스터, 마스터라인이 모두 공유했다. 디자인은 토요타 내부에서 이루어졌지만, 당시 일본에서 고급차로 여겨지던 미국차들을 주로 모방했다.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디자인 시안은 카이저, 캐딜락, 내시와 영국 포드의 것을 참고했고, 몇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여러 모델의 특징이 섞인 형태로 확정되었다.

일본 도로환경 고려해 내구성 높게 만들어

3년 남짓한 개발기간을 거친 크라운은 1955년 1월에 출시되었다. 크라운은 승차감과 주행특성을 고려해 앞 서스펜션을 좌우 독립식으로 만들었지만, 일본 도로환경을 고려해 견고하게 만든 덕분에 내구성이 뛰어났다. 그 덕분에 택시 업계는 택시용으로 출시된 마스터보다 승차감이 뛰어나고 운전하기 편한 크라운을 선호하게 되었다. 택시업체에서 크라운을 구입해 영업용으로 쓰는가 하면 토요타에 영업용 크라운 판매를 요청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수요층을 잃은 마스터는 1956년 11월에 일찌감치 단종되었다. 

처음부터 승용차 시장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고 디자인과는 별개로 설계와 생산에 이르는 대부분의 작업이 토요타 고유의 기술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크라운은 수입차에 손색 없는 ‘일본 최초의 본격 승용차’로서 패전 후 일본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특히 당시 일본 여건에 가장 알맞은 차로 개발되어 소비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1955년 말에는 진공관 라디오, 히터 등 고급 장비를 기본으로 갖춘 크라운 디럭스가 나왔고, 1956년부터 이어진 일본의 경기호황에 힘입어 큰 인기를 얻으며 크라운은 토요타의 대표 모델로 자리를 잡았다. 

독자 기술로 승용차를 완성한데 고무된 토요타는 1958년에 일본 승용차로는 처음으로 크라운을 미국에 수출했다. 미국 수출을 위해 토요타는 일찌감치 판매망을 확보하는 등 야심차게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나 거친 일본 도로환경에 맞춰 개발된 크라운은 미국에서 의외의 약점을 드러냈다. 견고하게 만든 차체는 무거운 탓에 연비가 좋지 않았고, 잘 닦인 도로에서 오랜 시간 고속으로 달리기에는 힘이 부족했고 심한 스트레스에 엔진 부품이 견디지 못했다.

성능과 품질이 미국 여건에 맞지 않아 크라운의 미국 진출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여러 면에서 1세대 크라운은 토요타와 일본 자동차 역사에 많은 상징적 흔적을 남긴 모델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크라운은 지금까지 대를 이어 토요타를 상징하는 고급차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