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역사를 바꾼 열 가지 장면

[ 오토카 한국판 2018년 2월호에 창간 10주년 특집 기획기사로 쓴 글입니다. ]

1886년 카를 벤츠의 자동차가 특허 등록되면서 시작한 자동차 역사가 어느덧 130년을 훌쩍 넘겼다. 그동안 자동차와 자동차 산업은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 가운데 자동차 발전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과 현상 열 가지를 꼽아 보았다.

1. 벤츠와 다임러의 자동차: 현대적 자동차의 등장

1886년에 고틀리프 다임러(위)와 카를 벤츠가 완성한 자동차

1886년 1월. 엔지니어 카를 벤츠는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탈것으로 독일 특허 37435호 등록증을 받았다. 이전해인 1885년에 완성된 그의 세 바퀴 탈것은 자동차 역사에 첫 장을 쓴 주역이었다. 그의 발명품은 특허를 받은 자동차라는 뜻에서 파텐트 모토바겐(Patent MotorWage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론 그 전에도 ‘말 없는 마차’는 존재했다. 증기기관을 쓴 것도 있었고, 1861년에 니콜라우스 오토가 효율적인 4행정 내연기관을 처음 만든 뒤로 자동차를 만들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에티엔 르느와르나 지그프리드 마르쿠스처럼 카를 벤츠에 앞서 그 시도가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발명품을 성공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했다. 결국 카를 벤츠는 그의 기술적 도전이 살아남은 덕분에 현대적 자동차의 아버지가 된 셈이다. 

카를 벤츠와 같은 시기에 비슷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하던 고틀리프 다임러도 빌헬름 마이바흐와 함께 설계한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다. 내연기관의 아버지인 오토와 함께 일했던 다임러는 1885년에는 엔진 달린 자전거를, 1886년에는 세계 최초의 네 바퀴 자동차를 완성했다. 이어 1889년에는 변속기와 현대적 조향기구까지 갖춘 것은 물론, 마차의 틀에서 벗어나 고유의 구조를 가진 첫 자동차를 만들었다. 다임러는 자동차 개발 붐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파나르 & 르바소와 푸조가 다임러 설계의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들었고, 영국과 미국, 오스트리아에도 다임러의 기술로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들이 세워졌다.

최초의 자동차를 만든 이에 관한 논란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희미했던 자동차의 개념이 뚜렷해지도록 발전의 바탕을 탄탄히 다진 인물이 벤츠와 다임러임에는 틀림없다.

2. 포드의 일관 생산공정 개발: 자동차 대중화의 시작

1913년 포드 하이랜드 파크 공장의 모델 T 조립 라인 모습

부품 표준화를 통해 자동차 대량생산의 길이 열리고, 고장나거나 부서진 부품을 교체해 수리하는 개념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올즈모빌의 공로다. 그 덕분에 올즈모빌 커브드 대시는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어 판매된 자동차로 기록될 수 있었다. 물론 그 기록은 오래 가지 못했고, 금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포드가 개발한 새로운 생산기법과 그 기법으로 만들어진 제품 때문이었다. 포드가 일관 생산공정으로 모델 T를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탈것으로 널리 쓰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델 T 생산이 시작된 1908년만 해도 포드의 생산방식은 노동자의 손에 의존하던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910년 새로 만든 하이랜드 파크 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면서 공정은 체계화되기 시작했고, 1913년에는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일관 생산공정이 완성되었다. 공장 전체가 마치 하나의 커다란 기계처럼 움직이고, 노동자는 그 안에 속한 공정의 일부로서 자신이 맡은 분야의 작업을 반복하게 되었다. 부품과 공정이 단순화되며 생산효율과 속도는 더 높아지고, 부품의 대량구매를 통해 제품 값은 점점 더 낮아졌다. 

이전까지 모델 T 한 대를 조립하는 데에는 12.5시간이 걸렸지만, 일관 생산공정이 자리를 잡은 1914년에는 1.5시간으로 짧아졌고, 1925년에 이르러서는 하루 9,000~1만 대, 연간 200만 대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1910년에 대당 900달러였던 값도 1925년에는 260달러까지 낮아졌다. 역사상 처음으로 1,500만 대를 생산한 기록을 남긴 모델 T는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고, 포드가 기틀을 다진 자동차 생산방식은 발전과 개선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3. ‘중요한 것은 생산이 아니라 수익“: 슬론주의의 등장

GM의 체질을 바꾼 경영자 알프레드 슬론(왼쪽)과 1929년형 쉐보레 인터내셔널 시리즈 쿠페

포드 모델 T는 자동차 대중화를 이끌었지만, 획일화된 제품에 소비자는 흥미를 잃었다. 보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자동차 판매증가율은 뚝 떨어졌고, 대신 일관 생산공정을 도입하는 업체가 늘어나며 경쟁은 심해졌다. 모델 T 생산이 중단된 1927년에 포드는 GM의 브랜드 중 하나인 쉐보레에게 시장 1위 자리를 내어주었다. 업계 전반에서는 운전을 편리하게 만드는 몇 가지 기술이 등장한 것을 빼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대량생산되는 자동차의 기본 기술과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1920년대 GM의 경영자가 된 알프레드 슬론은 자동차 회사의 근본을 다시 생각했다. ‘기업의 최우선 목표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뿐 아니라 수익을 내는 데에 있다“는 것이 슬론의 철학이었다. “설계에서 가장 앞서 나가거나 새로운 기술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경쟁자의 가장 뛰어난 기술과 같은 수준이면 충분하다.” 그가 주도한 조직개편과 더불어 비용절감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빈 카운터(bean counter)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그런 철학에서 탄생한 것이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였다. 소비자가 새 제품을 사도록 유도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문제가 없는 제품을 낡아보이게 만드는 새 제품을 내놓는 제품 정책을 펼친 것이다. 계획적 진부화의 가장 좋은 수단은 디자인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 결과 기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부분들을 중심으로 손질하는 페이스리프트 개념이 등장했다. 슬론은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며 GM을 미국 최대 자동차 업체 자리에 올려놓았고, 자동차 산업의 중심을 제품에서 마케팅으로 옮겨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4. 콘셉트카의 등장: 디자인이 중요한 가치가 되다

1938년에 등장한 뷰익 Y-잡. 콘셉트카의 시초로 여겨진다

슬론주의는 자동차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제품의 모습까지도 바꿨다. 자동차 업계 처음으로 GM 내부에 디자인을 담당하는 ‘예술 및 색채 담당 부서(Art and Color Section)’를 만든 것도 슬론의 뜻이었다. 좋은 디자인이 제품과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인 사례는 그 전에도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 나온 아름다운 차들은 전문 코치빌더가 차체를 얹고 있었다. 슬론은 코치빌더를 인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자인이라는 자산을 회사의 것으로 만들어 조직화했다. 물론 돋보이는 제품으로 경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판매를 늘리고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 궁극의 목표였다. 

슬론은 캐딜락의 자매 브랜드인 라살을 디자인해 성공을 이끌어낸 할리 얼을 부서장으로 앉혔다. 얼은 모델링 클레이를 활용해 디자인을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었고, 그와 같은 방식은 이후 자동차 디자인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얼은 슬론과 수시로 의견을 나누며 계획적 진부화를 구현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업계 최초의 콘셉트카인 Y-잡(Y-Job)을 내놓았다. Y-잡은 앞으로 뷰익 브랜드 양산차에 반영할 디자인 개념과 특징을 실제 차로 만들어 미리 보여주기 위한 차였다. 그리고 실제로 Y-잡의 디자인과 기술적 요소들은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뷰익 양산차에 다양하게 반영되었다.

디자인이 판매에 주는 영향이 자동차 업계가 디자인 자산을 품게 된 이유였고, 콘셉트카는 나아가 디자인의 영향력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그뿐 아니라 설계와 단절되어 있던 디자인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까지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얼이 업계 처음으로 부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5. 제2차 세계대전: 수면 위로 올라온 4륜구동차

군용차로 선보여 4륜구동 차의 대량 보급에 결정적 역할을 한 윌리스 MB

포장된 도로보다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았던 자동차 태동기부터 험로를 달리기에 유리한 4륜구동 기술을 갖춘 차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1903년 파리-마드리드 경주에 출전한 스피케르 형제의 60 H.P., 1907년 아프리카 식민지 관리자를 위해 다임러가 특별히 제작한 데른부르크 바겐 등은 초기 4륜구동 차의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4륜구동 차가 널리 쓰이고 사람들의 기억에 고유의 장점을 각인하게 된 계기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특정한 차의 애칭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지금은 4륜구동차 전문 브랜드로 우뚝 선 지프가 있다. 지프의 원형인 윌리스 MB는 기동력이 중요한 정찰용 소형차로, 세계 각지의 전장에 대량으로 빠르게 투입할 수 있도록 간단하고 분해조립이 쉬우면서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미군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볼 수 있었고, 원래 목적 외에도 지프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GP(범용)차로 활약하면서 만능차 이미지가 굳어졌다. 양은 물론 성능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독일의 퀴벨바겐을 능가한 덕도 컸다.

전쟁이 끝난 뒤 민간용으로 거듭난 정통 지프와 별개로, 윌리스 MB는 여러 4륜구동차의 원형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국의 랜드로버, 러시아의 GAZ-67, 프랑스의 들라이에 VLR, 이태리의 알파로메오 마타와 피아트 캄파뇰라 등은 모두 윌리스 MB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군용과 관용 등 특수용도로 주목받던 4륜구동 차가 좀 더 대중적인 SUV로 발전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자동차의 활용영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지프와 더불어 넓어지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6. 어느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사람 중심의 자동차 철학

랄프 네이더가 저서 ‘어느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에서 조명한 쉐보레 콜베어

자동차 대중화는 사람들의 생활을 편하게 바꿔놓았지만, 그만큼 교통사고도 빠른 속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안전과 관련한 기술은 자동차 성능이 발전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소비자 인식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자동차 업체들이 신경을 쓰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오랫동안 차의 안전성과 판매의 상관관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안전장비는 일종의 덤과 같은 개념이었다. 1950년대 메르세데스-벤츠가 크럼플 존 개념을 도입하는 등 고급차를 중심으로 자동차 설계에 안전개념이 쓰이기 시작했지만 대중화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그런 흐름을 바꾸는 계기 중 가장 영향력이 큰 것으로 변호사 랄프 네이더가 1965년에 쓴 <어느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Unsafe at Any Speed)>라는 책을 꼽을 수 있다. 자동차 제조업체가 이익을 높이기 위해 소홀히 하거나 은폐했던 안전 기술을 지적한 책으로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물론 제도적 안전기술 설치 의무화와 공인기관의 안전시험 및 평가제도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자동차 안전기술에도 획기적 전환점이 있었다. 볼보가 1968년 3점식 안전벨트 특허를 무료로 공개해, 모든 자동차 회사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엔지니어 닐스 볼린이 볼보에서 일하던 1959년 처음 개발해 특허를 얻은 3점식 안전벨트는 지금까지 개발된 자동차 안전기술 중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손꼽힌다. 미국 고속도로 교통안전국(NHTSA)은 3점식 안전벨트가 미국에서만 한해 1만 1,000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1960년대를 전후해 있었던 일련의 일들에 힘입어, 자동차 업체와 소비자는 물론 국가기관에 이르기까지 자동차 안전에 관한 인식이 과거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7. 석유파동: 일본차의 위상이 높아지다

석유 파동 당시 미국 주유소 모습 (David Falconer via Wikimedia Commons/NARA/EPA)

1973년에 일어난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 이후, 아랍의 주요 석유수출국이 원유 생산을 줄이고 값을 올리면서 세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른바 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태로 세계 각국의 산업은 물론 연료를 석유에 의존하는 자동차도 발목이 잡혔다. 이전보다 몇 배나 되는 돈을 내고 사려고 해도 연료를 사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자동차 선택기준이 달라지기에 이르렀다. 연료를 적게 쓰는 차, 더 정확히 말하면 연료비가 적게 드는 차가 많이 팔리게 된 것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인 미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랫동안 이어진 호황으로 소비자들은 큰 차에 익숙해져 있었고, 소비가 많은 만큼 연료단가도 낮아 자동차에서 연비는 큰 고려조건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석유파동을 맞닥뜨리게 되자 미국 자동차 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고, 상대적으로 작고 경제적인 일본차에 수요가 몰렸다. 일본 자동차 업계는 1960년대 고도 경제성장에 힘입어 내수 시장에서 크게 성장했고, 치열한 경쟁으로 품질과 성능도 꾸준히 좋아진 덕분에 높은 수준의 제품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유리한 환율이 뒷받침하면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일본차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주요 시장에 빠르게 파고들었고, 이어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이어진 2차 석유파동을 통해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일본차의 파괴력은 여러 나라의 자동차 산업에 위협이 되었고, 결국 1985년 미국이 주도한 환율조정을 비롯해 무역장벽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벽을 피하기 위해 현지생산에 적극 나서면서 일본 자동차 산업의 세계화로 이어지게 된다. 

8. 세상을 바꾼 기계: 자동차 생산의 틀을 바꾼 토요타 생산방식

토요타가 1953년 정한 모토 ‘좋은 제품은 좋은 생각에서’는 토요타 생산방식의 바탕이 되었다

일본차가 시장을 뒤흔드는 것에 충격을 받은 미국에서는 일본차의 성공 비법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가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 하나가 1991년에 나온 <세상을 바꾼 기계(The Machine That Changed the World)>라는 책이다. 책에서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진이 5년여에 걸쳐 파헤친 토요타 생산방식을 다뤘다. 집필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생존을 위해 토요타가 갈고 닦은 토요타 생산방식의 핵심을 린 생산방식(lean production)이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포드가 모델 T 생산을 통해 구현한 대량 생산방식(mass production)의 상대 개념으로 쓴 린 생산방식이라는 표현은 곧 자동차 분야를 뛰어넘어 산업 전반의 유행어가 될 정도로 파급효과가 컸다.

오노 다이이치가 중심이 되어 체계화한 토요타 생산방식은 회사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장비 요소를 철저하게 없앰으로써 생산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토요타 생산방식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동차 업계 후발주자로서 미국식 대량 생산을 그대로 따르기 어려운 환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했다. 그 결과 저스트 인 타임과 자동화(自働化)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생산 흐름에 따라 재고와 문제점을 최소화하는 합리적 생산관리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 방식은 원가절감과 품질개선 등 많은 장점이 돋보였고, <세상을 바꾼 기계> 출간 이후 자동차뿐 아니라 여러 산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0년대 초반 파산 위기에 처했던 포르쉐의 기사회생을 가장 크게 도운 것 역시 토요타 생산방식이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허점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토요타 생산방식이 20세기 후반 자동차 생산의 틀을 바꾸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9. 하이브리드 카 실용화: 친환경+경제성의 시대

1995년 도쿄 모터쇼에 전시된 토요타 프리우스. 2년 뒤 첫 하이브리드 승용차로 양산되었다

1970년대 이후 환경관련 규제 강화와 석유 수급불안의 영향으로 자동차 연료의 탈 석유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해법 중 하나로 떠오른 것이 전기차였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가 부담없이 구매해 쓸 수 있는 전기차의 개발은 당시 기술로는 쉽지 않았고, 유가가 안정되면서 친환경차에 대한 관심도 누그러졌다. 그러던 것이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청정대기법으로 친환경차 판매를 의무화하고 걸프전을 시작으로 석유수급이 다시 불안해지면서 경제적인 친환경차를 개발하는 것이 자동차 회사의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여전히 순수 전기차는 실용화가 어려운 단계였기 때문에 대안이 필요했는데, 토요타가 가장 현실적 대안으로 1997년에 내놓은 것이 내연기관차와 전기차의 특성을 결합한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였다. 내연기관과 전기 모터의 힘을 모두 활용하는 자동차의 개념은 자동차 태동기부터 있었지만, 소비자가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가격에 보편적 내연기관차 수준의 실용성과 납득할 수 있는 성능을 모두 갖춘 하이브리드 카는 프리우스가 처음이었다. 하이브리드 카는 초기에는 비싼 값과 이질적인 디자인 및 주행감각 등으로 판매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1세기 들어 지구온난화가 세계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고유가가 지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과 미국 시장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디젤 선호도가 높은 유럽에서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지만, 자동차 전동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하이브리드 카 보급 확산의 영향이 컸다. 또한, 배터리와 감속 에너지 재활용, 전기 에너지 관리 시스템 등 전기차 관련 기술과 부품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도 하이브리드 카가 준 긍정적 영향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10. 디젤게이트: 자동차 전동화에 쐐기를 박다

디젤게이트에 연루된 폭스바겐의 2.0L TDI 엔진

2015년 9월에는 독일 최대 규모의 자동차 업체인 폭스바겐에게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사건이 불거졌다. 폭스바겐이 배출가스 시험 때와 일반 도로 주행 때 디젤 엔진 제어 소프트웨어가 서로 다르게 작동하도록 의도적으로 프로그래밍해 청정대기법을 위반했다고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밝힌 것이다. 폭스바겐의 일부 디젤 엔진 모델은 일반 도로 주행 때 기준치의 최대 40배에 이르는 질소산화물을 내놓는 것으로 나타났다. 폭스바겐은 곧 사실을 인정했고, 전 세계에 판매된 1,100만여 대에 그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확인했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주요 자동차 업체의 디젤 엔진 모델에서 비슷한 의혹이 불거져 세계 각국에서 조사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디젤게이트로 번졌다.

대부분 자동차 업체는 법규상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디젤게이트는 필연적으로 배출가스가 생기는 내연기관의 퇴출과 자동차의 전동화 속도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아무리 배출가스를 줄인다고 해도 내연기관을 쓰는 한 완전한 자동차는 대기오염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테슬라를 비롯해 전기차 생산 업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한편, 세계 여러 나라 정부와 지자체가 내연기관차 판매중단 시한을 정하면서 폭스바겐을 비롯해 디젤차 생산 비중이 큰 유럽 자동차 업체들도 서둘러 전기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30년 넘는 자동차 역사 내내 동력원의 핵심을 이룬 내연기관의 퇴출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디젤게이트는 소비자가 체감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동차 역사에 새로운 장을 시작하게 만든 일대 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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