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6월 18일에 오토엔뉴스를 통해 다음 자동차 섹션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6월 17일로 막을 내리는 2018 부산국제모터쇼(이하 부산모터쇼)의 슬로건은 ‘혁신을 넘다, 미래를 보다’였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자동차의 역사는 도전과 혁신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만들어졌다. 그런 점에서 부산모터쇼에 전시관을 꾸민 여러 브랜드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도전과 혁신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돋보이는 곳은 메르세데스-벤츠였다.
모터쇼는 대개 자동차 브랜드가 새차와 컨셉트카, 새 기술 등 주로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전시관을 꾸민다. 그러나 메르세데스-벤츠는 국내 모터쇼에서 그동안 보았던 대다수 전시관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물론 전시관 한가운데에는 기술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최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과 함께 미래 차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컨셉트 EQA가 모여 메르세데스-벤츠의 전기차 브랜드인 EQ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새차와 컨셉트카 이상으로 눈길을 끈 것은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한 더 많은 수의 클래식카들이었다.

거의 작은 박물관을 옮겨다 놓은 듯, 20세기 초에 나온 초기 메르세데스 모델부터 1970년대 세계 각국 지도자와 유명인사에게 사랑받은 600 풀만에 이르는 여러 대의 클래식카와 경주차가 전시관 대부분을 차지했다. 승용차뿐 아니라 모터스포츠에 직접 출전했거나 영향을 받은 차들도 있었다.
독일 경주차가 얻은 명성의 시발점으로 1930년대 ‘실버 애로우(은빛 화살)’라는 별명을 얻은 W25 경주차와 현대적 메르세데스-벤츠 스포츠카의 원류로 여겨지는 1950년대의 300 SL 쿠페를 사이에 두고 최신 포뮬러 원(F1) 경주차 기술로 특별히 만든 스포츠카인 메르세데스-AMG 프로젝트 원이 시선을 끌었다. 새차들을 압도하는 옛차들의 카리스마는 보는 이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메르세데스-벤츠 뿐 아니라 이번 부산모터쇼에 참가한 업체들 가운데에는 직접 옛차를 전시하지는 않았어도 브랜드와 주요 모델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전시물을 만든 곳이 여럿 있었다. 재규어는 대표적 대형 세단인 XJ 탄생 50주년을, 랜드로버는 브랜드 탄생 70주년을 기념해 그동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내용으로 한쪽 벽면을 채웠다. 최근 클리오 출시와 더불어 르노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르노삼성은 르노가 1898년부터 1903년까지 생산한 첫 모델인 타입 A 브와트레를 클리오, 특별히 제작한 전기차 트위지 S.T. 듀퐁 에디션과 나란히 전시했는가 하면, 장수 모델 SM5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SM5의 간략한 역사를 벽면에 기록하고 그 앞에는 삼성자동차 출범 당시 임원용으로 10대를 특별 제작한 SM530L을 세워 놓기도 했다.
르노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소비자가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식하는 곳들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무형의 유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자동차의 형태로 그들의 탄생에서 발전까지의 과정을 읽을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한 셈이다. 흔히 말하는 헤리티지(Heritage) 마케팅 차원에서 모터쇼 공간을 기획하고 구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메르세데스-벤츠 전시관은 의미 있는 옛 모델들을 짜임새 있게 한 자리에 모은 것만으로도 브랜드에 대한 신뢰와 이미지를 높이는 효과를 불러왔다. 마케팅을 위해 억지로 콘텐츠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헤리티지를 쌓아온 실제 차들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헤리티지 스스로 마케팅의 역할을 하는 모습을 연출한 셈이다.
국내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물론 일반 소비자 가운데에서도 클래식카나 헤리티지 관련 콘텐츠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간단히 말해 ‘돈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워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헤리티지의 가치와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정해진 마케팅 방향에 끼워 맞추려는 과정에서 답을 얻지 못해 생기는 일이다.
물론 클래식카나 헤리티지 관련 사업이 단기적 수익을 높이기에는 맞지 않는 아이템이긴 하다. 그러나 내연기관의 시대가 저물고 전기차 시대가 다가오면서 자동차 브랜드와 제품에서는 기술 이외의 가치가 더 중요하게 돋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프리미엄 브랜드일수록 자동차가 모빌리티로 개념을 바꾸고 있는 이 시기에도 헤리티지를 내세우는 것이다. 외국에 뿌리를 둔 브랜드들이 점차 헤리티지 관련 사업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헤리티지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돈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다.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고, 모르기 때문에 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자동차 문명의 시발점 중 하나로 꼽히는 유럽 시장에서는 클래식카나 헤리티지와 관련해 크고 작은 이벤트와 사업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과거 이름을 날리던 몇몇 튜닝 브랜드들도 클래식카 관련 사업을 이미 시작했고, 내연기관 시대의 느린 종말을 앞두고 전설적 명차들과 희귀한 차들은 경매시장에서 상상을 넘어서는 값으로 거래되기도 한다.
물론, 국내 자동차 업계의 성장 계기와 과정은 메르세데스-벤츠와 직접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기는 하다. 한편으로 마냥 남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규모 면에서는 세계적 규모가 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도 이제는 역사가 50년이 훨씬 넘는다. 이제는 슬슬 헤리티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가 쌓였다.
실물로 남아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차들이 역사와 전통이라는 브랜드의 탑에 기초 역할을 하듯,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도 헤리티지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문화적으로 성숙한 소비자들에게 자신들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통해 신뢰를 줄 수 있다면 올바른 투자다. 부산모터쇼의 여러 헤리티지 관련 콘텐츠에 관심을 보인 관람객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에서도 헤리티지 관련 콘텐츠가 돈이 되지 않는 시대는 슬슬 저물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