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재생산 – 를르슈 감독이 만든 페라리 영상

페라리가 6월 14일에 온라인 채널을 통해 영상 하나를 공개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루 지난 6월 15일자로 보도자료가 나왔고요. 페라리는 이미 지난 5월 말에 이번에 공개된 영상을 만들었고 공개를 예고하는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로 내보냈는데요.

예고성 보도자료에는 자동차 애호가들이나 페라리 팬들이 주목할 만한 이야기거리들이 많았습니다. 자료에 나온 이름들이 예사롭지 않았거든요. 등장하는 차가 페라리의 고성능 스포츠카인 SF90 스트라달레라던가, 그 차를 몬 사람이 페라리 F1 팀 드라이버인 샤를 르클레르(Charles Leclerc)라던가,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된 F1 모나코 그랑프리가 열릴 예정이었던 모나코 스트리트 서킷에서 촬영을 했다던가, 영상을 찍은 감독이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 중 하나로 꼽히는 클로드 를르슈(Claude Lelouch)라던가…

아마 저처럼 옛날 차들이나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보도자료에 나온 를루슈 감독이 만들었던 단편영화 ‘랑데부(C’était un Rendez-Vous)’ 이야기에 혹하셨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분이 보셨을 테고, 다른 나라에서도 애호가들 사이에 전설처럼 여겨지고 있는 영상이니까요. 뒷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한데, 일단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단편영화 ‘랑데부’ 먼저 공유해 봅니다.

이 영화는 를루슈 감독이 1976년에 만들었는데요. 보시다시피 8분 남짓한 영상입니다. 텅빈 파리의 새벽거리를 열심히(!) 달리는, 아주 단순한 영상이지만 명쾌한 결말이 모든 것을 설명하죠. 자세한 영화 뒷이야기는 아시는 분도 많겠고, 인터넷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래도 를루슈 감독이 자동차와 모터스포츠를 좋아하기로 유명하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우리나라에서 그가 감독한 영화 중 가장 잘 알려진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도 이야기의 배경으로 모터스포츠(르망 24시간 레이스)를 활용했으니까요.

저는 처음 이 영상을 접했을 때 정말 멋진 영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자동차 애호가들이 전설로 여기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죠. 그래서 이 영상을 만든 를루슈 감독이 페라리와 손잡고 이 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새 영상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큰 기대를 하게 됐죠. 그리고 기다리던 영상이 공개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봤습니다. 러닝타임이 6분이 채 되지 않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고요. 이번에 공개된 ‘위대한 만남(Le Grand Rendez-Vous)’은 이렇습니다.

이번 영상을 보고 좀 심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영상 자체보다는 영상의 의미와 관련된 이야기거리들이 더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죠.

페라리는 이번 영상 제작과 공개가 ‘일상으로의 복귀’를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페라리의 모터스포츠 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F1 그랑프리가 시작된 이래 유일하게 지금까지 모든 시즌, (제 기억이 맞다면) 모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모나코 그랑프리도 F1 모든 그랑프리 가운데 모든 시즌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치러졌죠.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져 온 역사가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쉼표를 찍은 겁니다. 엄청난 일이죠.

이런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서 허무하게 넋 놓고 있기 보다, 사람들에게 페라리와 F1, 모나코 그랑프리의 열기와 열정을 잊지 않을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페라리가 영상을 기획한 의도였을 겁니다. 거기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흥미로운 요소들을 잔뜩 집어 넣은 것이죠.

영상에 등장하는 SF90 스트라달레는 스쿠데리아 페라리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나온 차입니다. 그리고 차를 몬 샤를 르끌레르는 영상을 찍은 모나코 출신이면서 스쿠데리아 페라리 간판 드라이버(원래는 세바스티안 베텔이었지만 올해 말에 팀을 떠날 예정이죠)이고요. 영상을 찍은 날은 예정대로라면 모나코 그랑프리가 열렸을 5월 24일이었습니다.

여기에 앞서 이야기했듯 영상의 감독은 원작격인 ‘랑데부’를 찍은 를루슈 감독이 맡았고, 영상 초반과 후반에 등장하는 플로리스트는 감독의 손녀인 레베카 블랑를루슈(Rebecca Blanc-Lelouch)입니다. ‘랑데부’의 결말 부분에 나오는 당시 를루슈 감독의 연인 구닐라 프리덴(Gunilla Friden,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두 번째 배우자)과의 관계에서 나온 자녀의 딸이라고 하네요.

달리는 코스는 실제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영상을 보면 르클레르는 절대 느리게 달리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르클레르 혼자 SF90 스트라달레를 몰고 달리지만, 한 바퀴를 돌고 나서 모나코 국왕 알베르 2세가 동승해 한 바퀴를 더 돌고, 이어서 블랑를루슈가 꽃다발을 전달한 뒤에 동승합니다. 마지막에 차 안에서 마스크를 벗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두 영상을 직접 비교하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영상을 만든 이유와 목적도, 내용도, 보는 사람들이 영상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번에 공개된 ‘위대한 만남’보다 그 모티브가 된 ‘랑데부’가 더 마음에 와 닿는데요. 아마도 그건 영상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원작 격인 ‘랑데부’가 더 크기 때문일테고, 근본적으로는 그런 연출에 더 공감하는 저의 아재감성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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