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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생활 2000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76년 99 모델에 처음으로 터보를 사용한 뒤 ‘4기통 저압 터보 엔진’은 사브와 동의어처럼 취급되어왔다. 양산차에 이처럼 적극적으로 터보를 활용하는 메이커도 드물다. 시승한 9-5 에어로는 사브의 4기통 터보 엔진 라인업의 최고봉에 서 있는 모델이다. 맛깔 나는 드라이빙을 기대하며 시승에 들어갔다.

사브 9-5의 외관은 ‘물찬 제비’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색상도 제비를 연상케 하는 검은색. 풍부한 볼륨감과 날렵한 선이 적절히 조화된 감칠 맛 나는 스타일이다. 스포티함이 느껴지지만 스포츠카와는 다른 감각은 호평하고 싶다. 차체 아랫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에어로 파트는 물찬 제비를 한결 더 날렵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좁고 가는 리어 스포일러는 원래의 둔한 트렁크 라인을 시원하게 보이도록 해주는 에어로만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3스포크 휠은 어울리는 차가 드문 편인데 사브는 적극적으로 3스포크 휠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특이한 스타일링과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사브만큼 3스포크 휠이 잘 어울리는 차는 없었다.

묵직하고 두터운 도어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면 사브만의 특이한 대시보드가 눈에 띈다. 넓은 인스트루먼트 패널은 우드 그레인으로 처리되어 있다. 스포츠 모델에 우드 그레인은 좀 어색한 느낌이나 에어로에는 카본 그레인보다 우드 그레인이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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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리모컨이 달린 4스포크 가죽 스티어링 휠은 굵기와 감촉이 차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적당하다. 떼어다가 필자의 차에 달고 싶을 정도다. 계기판은 나이트 패널 기능이 있어 밤길을 달릴 때 운전자가 복잡한 계기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속도계만 표시해주는 기능이다.

오디오는 200W 9스피커의 하만 카돈(Harman Kardon) 제품이 설치되어있다. 하만 카돈이라 하면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스피커 및 카오디오로 유명한 JBL이나 인피니티와 같은 회사의 브랜드다. 버튼이 크고 단순해 조작은 편리하지만 음색조절이 다양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트립 컴퓨터, 오디오, 공조장치가 높게 자리잡고 있는 센터 페시아는 사용하기가 매우 편리하다. 트립 컴퓨터 오른편에는 컵 홀더가 자리잡아 살짝 눌러주면 컵 한 개를 놓을 수 있는 `고리`가 아래로 내려온다. 미국과 달리 유럽시장에서는 컵 홀더가 많은 것이 큰 장점으로 작용하지 않음을 짐작케 한다. 맨 밑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재떨이는 껌 두 통이 간신히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작아 애연가들에게는 섭섭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도어 내부는 9-3의 경우처럼 앞뒤 도어가 비슷한 모습이다. 앞좌석의 맵 포켓이 작은 편인데 이를 보완이라도 하려는 듯 두터운 B필러 안쪽에는 그물로 된 작은 수납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보디 색과 잘 맞는 검은색으로 처리된 가죽시트는 깔끔하게 처리되어있고, 시트 폭이 조금 여유가 있어 편하긴 하지만 코너링 때 몸을 잡아주는 데에는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헤드레스트에 사브만의 독특한 안전장비 SAHR 시스템이 적용된 앞시트는 벤틸레이팅 기능이 있어 방석과 등받이 부분에서 공기를 빨아들여 땀이 차는 것을 막아준다.

히팅기능과 마찬가지로 4단계로 조절할 수 있는데 팬 소음이 크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쾌적한 운전을 보장하는 유용하고 재미있는 장비가 아닐 수 없다.

뒷자리에 앉으면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벨트라인과 보기 드물게 두터운 C 필러, 그리고 적당히 부드러운 쿠션의 가죽시트 덕분에 포근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뒷자리 중심의 차는 아니다. 뒤에 탄 승객을 위한 시거잭과 에어 벤트가 있지만 차의 실용성을 높이기 위한 장비일 뿐 운전수를 두고 뒷자리에서 편하게 졸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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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한 에어로 모델의 엔진은 사브의 자랑인 9-3 비겐에 얹힌 것과 같은 것으로 미쓰비시제 터보가 달렸다. 기본적으로 2.3리터 엔진(2.3t)과 같지만, ECU의 엔진 컨트롤 로직을 바꾸어 60마력의 출력향상을 얻어냈다. 230마력의 최고출력은 V6 3.0리터 엔진(3.0t)보다 30마력이 높은 수치다.

국산차의 ECU에 16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사용되기 시작한 지가 불과 2년 남짓한데 비해 사브의 트라이오닉 시스템에는 이미 32비트 프로세서가 사용되고 있다. 1,900〜4,600rpm까지 거의 평평한 곡선을 그리는 토크는 고른 가속감을 느끼게 해 준다. 9-5 에어로의 엔진은 ‘4기통 저배기량 엔진에 터보만으로 승부한다’는 비난에 일침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고 고른 힘을 자랑한다.

엔진음은 전반적으로 차분한 편이다. 시속 100km 내외에서 약간 거친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시승차만의 문제인 듯하다. 소음의 크기는 노면소음, 풍절음, 엔진음 순으로 2개의 사일런트 샤프트를 단 에코파워 엔진의 정숙성을 느낄 수 있다.

시승차는 AT 모델로 오버부스트(Over boost) 기능을 맛볼 수 없었다. 이것은 MT차에만 달리는 기능으로 급가속을 위해 액셀 페달을 바닥까지 밟으면 출력과 토크를 20초간 높여준다. 95% 이상의 차가 AT로 팔리는 미국에서 사브 4기통 터보 모델 구입자의 40%가 MT 모델을 선택한다는 것을 보면 오버부스트의 기능이 꽤 괜찮은 것 같다. 우리나라도 9-5 에어로만큼은 MT 모델을 들여와야 한다는 바람이다.

핸들링은 예민하고 정교하지만 독일차의 칼 같은 느낌은 아니다. 국내 오너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각도가 작은 급코너링 때는 언더스티어가 느껴지지만 차체의 기울어짐이나 땅을 차고 도는 감각은 안정적이다. 반면 각도가 큰 코너링에서 액셀 페달을 살짝 떼어주면 스물스물 오버스티어도 느껴진다.

액셀과 브레이크의 감각 역시 고르고 정교한 편이다. 페달을 밟을수록 반발력이 조금씩 커져 페달을 얼마나 밟고 있는지 바로 느낄 수 있다. 또한 액셀에서 발을 떼었을 때 엔진 회전수가 급격히 떨어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오른발을 브레이크로 옮길 수 있다. BMW 같은 직결감은 덜 해도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저속에서 묵직한 감이 드는 스티어링 휠은 고속에서도 약간 가벼워지는 정도다. 덕분에 고속에서의 차체 컨트롤이 별로 불안하지 않다. 코너링 때도 노면 요철에만 신경쓰면 될 뿐 횡방향으로의 흔들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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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S, 든든한 섀시와 서스펜션, 여기에 넓고 접지력 좋은 225/45 ZR 17 타이어가 조화를 이뤄 급코너링에서도 차체는 흐트러짐이 없이 원하는 선을 타고 나간다. 어지간한 차선변경에는 차체가 기울어질 줄을 모른다. 스프링, 댐퍼는 물론 스태빌라이저의 탄성도 한층 단단하지만 딱딱한 것은 아니고 적당한 부드러움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노면 요철에서 차체를 컨트롤하기가 쉽다. 이 정도면 승차감과 운동성능에 있어 모두 좋은 점수를 줄 수 있겠다.

가속반응은 일반적인 오토매틱 트랜스미션보다 빠른 느낌이 들고, 터보 래그도 거의 느낄 수 없다. 추월 때는 평범한 차에서 느끼기 힘든 세련된 가속감을 맛볼 수 있다. 시프트 레버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S 버튼을 누르면 스포츠 모드로 바뀌어 한결 박력 있는 달리기를 할 수 있다.

주행감각에 있어 경쟁차라고 할 수 있는 볼보 S70 T5와 비교해보면, S70 T5가 생긴 것 답지 않게 펄펄 날려고 한다면 9-5 에어로 역시 생긴 것 답지 않게 차분한 느낌으로 구석구석을 누빈다. 독일차들과 비교해 볼 때 사브 9-5 에어로는 비슷한 성능과 운동감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더 큰 여유와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9-5 에어로를 시승하고 느낀 점을 요약하자면 ‘맛있지만 조금 덜 찰진 찹쌀떡’이라고 말하고 싶다. 찹쌀떡은 씹을 때의 쫀득쫀득한 느낌과 적당히 달콤한 앙금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앙금은 맛있지만 쫀득쫀득한 맛이 덜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확실히 여러 모로 맛있어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라면 두고 먹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