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 메르세데스-벤츠 280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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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생활 200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옛 냄새 물씬 풍기는’, 나쁘게 말하자면 ‘유치한 구닥다리’ 풍경이 머릿속에 번져나갔다. 오렌지빛 아름다운 노을, 흐드러지게 가지를 내린 버드나무가 자리잡은 조용한 호숫가, 체크 머플러에 모직 코트를 입은 채 담배 한 대 가볍게 피워문 분위기 있는 남자, 그리고 그의 옆에 조용히 서있는 검은색 1975년형 메르세데스-벤츠 280 S. 그래. 이런 걸 보고 ‘그림 좋다’고 하는 거야.

시승의 대상이 되어준 멋쟁이는 만나기도 전부터 이런 상상을 하게 해 주었다. 국산차 얘기를 하면서 ‘1975년형’이라는 얘기를 흘리면 어떨까? 아마도 색 바래고 녹슬고 찌그러져 폐차장으로 끌려가는 불쌍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을까. 메르세데스-벤츠라는 이름이 갖는 그 품격과 존경심은 25년이라는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종의 마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필자가 엄마 젖 빨고 있을 무렵에 진델핑엔 공장을 굴러 나왔을 차를 만난다고 하니 좀 묘한 기분도 들었다.

메르세데스-벤츠식 섀시 표기법으로 W 116 라인업에 해당하는 모델인 1975년형 280 S는 지금 나오는 S 클래스의 할아버지뻘 되는 차다. 요즘으로 얘기하자면 S 클래스의 기본형인 S 280에 해당한다.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생산되었으니 시승차는 비교적 초기형 모델인 셈이다. 약간은 오래된 정장을 연상케 하는 보디라인에는 1960년대의 둥글둥글한 모습과 1970년대의 직선기조가 섞여 있어 근육질은 아니어도 단단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헤드램프와 보닛이 만나는 부분과 비교적 곧추선 앞 윈도에서는 클래식한 맛도 느낄 수 있다. 1960년대의 분리독립형 헤드램프의 틀을 벗어나 가운데 라디에이터 그릴을 중심으로 보디 앞부분을 감싸는 랩어라운드 타입의 헤드램프와 시그널 램프는 메르세데스-벤츠가 창조해낸 새로운 유행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차를 빼려고 기어 레버를 움직였다. 수동 트랜스미션의 시승차는 기어봉을 위로 끌어올리고 몸쪽으로 끌어당겨 밀어 넣는 ‘독일식 후진 기어’를 쓰고 있었다. 새차처럼 깔끔하고 직관적으로 움직여주는 것도 아니었고, 리어 뷰 미러 조절레버가 부러져 있어 후방시야는 룸미러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긴장한 상태로 출발을 했다. 휘발유를 채우기 위해 주유소에 들어가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려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센터콘솔 앞쪽에 파워 윈도 스위치가 모여 있다.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차에 파워 윈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복잡한 시내를 달리는 동안 차를 조심스럽게 몰면서 시동을 꺼뜨리지 않는데 주력해야 했다. 클러치가 얕으면서도 페달 답력이 커서 자칫 잘못하면 시동을 꺼뜨리기 쉬웠다. 페달 레이아웃이 평소에 몰던 차와 많이 달라 감각을 익혀야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메르세데스-벤츠의 가속 페달은 고정축, 피봇(pivot)이 바닥에 달려 있어 발끝 감각으로 페달을 조작해야 한다. 보다 정교하게 조작되는데 필자는 왠지 버스나 트럭이 자꾸 떠올랐다.

구리시를 지나 한강을 따라 올라가는 경춘국도로 들어섰다. 평일 낮시간에는 차가 별로 없어 기분 좋은 드라이브를 할 수 있는 코스다. 석유파동을 심하게 겪지 않았던 시대에 나왔고, 기본형인 탓인지 기어는 수동임에도 4단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그만큼 힘있는 달리기를 할 수 있었다. 가속페달에 힘을 가하면 ‘투투퉁’하며 나가는 느낌이 조금은 둔하게 느껴지지만 곧 고르고 부드러운 가속이 이어진다. 동행하게 된 시승차 오너에 따르면 시속 180km까지는 달릴 수 있다고 하는데 주행여건도 그렇고 오래된 차에 무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 적당한(?) 속도를 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티어링 휠의 유격이 커 건들거리긴 해도 스티어링 감각이나 핸들링은 수준급이었다. 차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머릿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최신형 차들 사이로 “나, 나이 많이 안 먹었어!”라고 얘기하는 듯 280 S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6번 국도를 부드럽게 달려나갔다.

사진촬영을 위해 이동하면서 잠시 뒷좌석에 앉아 운전하면서 느낄 수 없는 실내의 분위기를 보다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실내는 온통 파란색으로 도배되어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답지 않은 비닐 시트와 도어트림에 한 번 놀랐고, 요철마다 출렁이는 뒷좌석 시트 스프링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오래된 탓에 시트 스프링은 탄성이 줄어 곳곳이 주저앉아 있었지만 당대의 소재나 기술에 대한 기준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윈도 섀시의 처리가 인상깊었다. 요즘 중형차들만 해도 보디색의 철판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오래 전에 만들어진 차임에도 메르세데스-벤츠 280 S는 내장재와 같은 마감재로 싸여 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지금의 메르세데스-벤츠로 이르기까지 면면이 전해져 내려오는 고급차로서의 품위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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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에 도착해서 안팎으로 두루두루 여유를 두고 차를 살펴보았다. 차를 둘러보는 동안 허허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놈 참 잘 빠졌다. 멋있다.’ 나의 이런 속 생각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시승차는 위아래로 나뉘어진 2단 범퍼를 앞뒤로 달고 매끄럽게 처리된 헤드램프를 가진 유럽사양 모델이다. 당시 미국형 모델은 까다로운 법규 때문에 원형 듀얼 헤드램프와 독특한 형태의 충격흡수형 범퍼를 달고 있었다. 차의 높이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닌데 전반적인 지상고가 높은 편이라 차체가 붕 뜬 듯한 느낌이 든다. 대신 폭이 넓은 편이라 약간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이 모델만의 참 멋을 느낄 수 있다.

외관은 로커패널이 부분적으로 녹슨 것과 색이 바랜 헤드램프, 그리고 트렁크 옆부분이 약간 들어간 것을 제외한다면 잘 보존된 편이다. 초대형 보닛을 열면 세로로 놓여 있는 카뷰레터 방식의 직렬 6기통 2.7리터 DOHC 엔진이 눈에 들어온다. W 116 라인업 중 유일한 카뷰레터 방식이다. 엔진룸은 높은 배기량의 엔진도 얹을 수 있도록 상당히 크게 만들어져 여유공간이 많은 편이다. 이곳저곳에 보쉬, 마니에티 마렐리 등의 로고가 붙은 부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구조나 설계가 튼튼하다고 해서 오래 가는 차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프론트 서스펜션은 당대에 메르세데스-벤츠에 의해 새롭게 제안된 방식의 더블 위시본으로 댐퍼와 스프링이 분리되어 있는 구조다. 엔진이 세로로 놓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배치다.

문을 열고 실내를 들여다보면 온통 파란색과 직선 투성이다. 실내 레이아웃에서 원형을 그리고 있는 것은 인스트루먼트 패널과 스티어링 휠 뿐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텁게 니스칠이 되어 있는 진짜 우드 그레인이었다. 비록 오랜 세월 탓에 부분적으로 금이 가고 깨진 곳이 있었지만 요즘 차의 플라스틱제 우드 그레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멋이 느껴졌다.

그러나 메르세데스-벤츠라는 명성에 걸맞은 관리는 이루어지지 못한 느낌이다. 색은 많이 바래지는 않았지만 지저분해 보이는 시트와 트림은 물청소만 해 줘도 빛날 것 같다. 하지만 햇볕에 갈라진 대시보드 표면이나 비뚤어지고 찢어진 웨더 스트립 등은 교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차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충분히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부분들이라 아쉬움이 크다.

돌아오는 길은 따뜻한 봄 햇살에 시원한 강바람을 맛보기 위해 창문을 열고 달렸다. 새차를 시승하는 것과는 다른 여유와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운전을 하다보니 보닛 앞부분에 볼록 튀어나온 메르세데스-벤츠 엠블럼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25년을 그렇게 한 자리에서 빛나왔을 그 엠블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늙은 차와 낡은 차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한국 땅에서는 낡은 차만 존재할 뿐 늙은 차는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왔는데, 보기 드물게 제대로 보존된 늙은 차를 만나고 나니 더욱 더 제대로 된 보존과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차의 가치는 굴러다니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보존은 물론 제대로 된 리스토어도 아쉽게 느껴졌다.

시승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자꾸만 영화배우 신성일 씨와 메르세데스-벤츠 280 S가 겹쳐서 떠오른다. 사람도 그렇지만, 멋있게 늙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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