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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자동차생활에 실린 글입니다]

300ZX는 일본에서 ‘페어레이디’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미국에서는 ‘Z 카’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닛산이 페어레이디라는 이름으로 처음 스포츠카를 내놓은 것은 1959년 개발명 S211 모델부터다. 이듬해인 1960년부터 S211은 미국시장에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초창기 다른 일본차들과 마찬가지로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2년 발표된 SP310 페어레이디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고, 1969년 발표된 S30부터 본격적인 주목을 받았다. ​

미국시장에는 닷산 240Z라는 이름으로 판매된 페어레이디는 롱 노즈 숏 데크의 빼어난 스타일링과 낮은 rpm에서 높은 토크를 내는 2천400cc L24 엔진, 일본차로는 보기 드물게 스포티하게 세팅되었던 서스펜션과 핸들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1978년까지 10년간 롱런했다. 특히 240Z는 미국시장에서 닛산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로써 미국에서는 240Z의 끝에 붙은 Z에서 ‘Z 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

석유파동의 여파로 240Z의 뒤를 이은 S130 섀시의 260Z와 280Z는 240Z와 같은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터보를 도입하고 T바 루프를 채용해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Z카가 어떻게 변신할지를 보여주었다. 1983년에 등장한 Z31 섀시 모델에서는3천cc VG 30ET 엔진으로 분위기를 일신해 본격적인 GT카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수출용은 3천cc 엔진을 얹은 모델을 주력으로 내세우고, 이름도 지금과 같은 300ZX로 바뀌었다. 하지만 덩치가 덩치인 만큼 일본시장에서는 점차 그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

1989년, Z31에서 한 단계 진화한 현재의 300ZX, 페어레이디 Z가 등장했다. Z31 섀시에서 시작된 GT카의 모습은 Z32에서 한결 성숙해졌다. 미국시장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만큼 닛산 캘리포니아 스튜디오에서 기본 디자인을 맡아 일본차답지 않은 굵직한 라인에 일본 특유의 섬세함이 담겨진 스타일로 다시 태어났다. 덩치도 한결 커져 SP310에서 4m에도 못 미치던 차체 길이는 4.5m(2+2시터)를 넘어섰고, 폭은 승용차로서는 최고수준인 1.8m에 이르게 되었다. ​

Z32 섀시의 300ZX는 미국시장에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자동차 전문지 <오토모빌>에서 매년 뽑는 `10 베스트 카`에 90년부터 95년까지 6년간 연속선정될 정도였다. 미국시장에서는 대부분의 자동차잡지에서 최고의 평을 들으며 비교적 대중적이면서도 뛰어난 품질과 성능을 지닌 스포츠카로 자리매김했다. ​

반면 일본시장에서는 같은 해 새롭게 부활한 스카이라인 GT-R이 닛산의 대표적 스포츠카로 떠올라 페어레이디 Z의 입지는 좁아졌다. 다분히 미국적인 페어레이디 Z와 일본적인 스카이라인 GT-R은 고유의 성격과 성능, 이미지로 각각 미국과 일본에서 90년대를 풍미한 스포츠카로 꼽히고 있다.

90년대 후반 들어 스포츠카 붐이 사그라들며 판매대수가 줄어들자 일본제 스포츠카들이 대거 미국시장에서 철수하게 되고, 이 대열에 300ZX도 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꾸준히 찾는 고객들이 있어 아직도 일본에서는 페어레이디 Z라는 이름으로 Z32 모델이 팔리고 있다. 판매년수로 따진다면 240Z를 능가하는 롱런인 셈이다. 경쟁모델이라 할 수 있는 스카이라인 GT-R이 두 번의 모델 체인지를 거친 것에 비교한다면 같은 엔진, 같은 섀시로 11년간을 버틸 수 있는 것은 닛산의 경영난 탓이라기보다는 Z32 모델의 우수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

날씨도 덥고 일도 잘 풀리지 않아 ‘뭔가 시원한 느낌의 차’를 만나보고 싶던 차에 <자동차생활>에서 300ZX 트윈 터보 모델을 시승해 달라는 얘기를 듣고 한껏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프라모델로 여러 번 접해본 모델이라 그 날렵하고 세련된 스타일링을 생각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힘이 넘치고 굵직한 선이 가득한 스카이라인 GT-R이 필자의 드림카이긴 하지만 선이 크고 시원한 300ZX도 나름대로 매력덩어리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

김포의 한 자동차 매매상에서 처음 300ZX를 만났을 때 두 번 놀랐다. 우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볼륨감 있는 몸매를 보고 놀랐고, 다음에는 뽀얗게 먼지가 쌓여 초라해 보이는 차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닛산을 대표하는 스포츠카로 명성을 얻은, 명차라면 명차랄 수 있는 차가 이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니 한눈에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

아니나 다를까. 오랫동안 그냥 세워져 있었던 탓에 배터리가 모두 방전되어 출발부터 배터리 점프로 시동을 걸어야 했다. 당대 최고의 스포츠카로 군림했던 차가 한국에 와서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어렵게 시동을 걸고 나서 더운 날씨에 에어컨이라도 켜볼까 했더니 에어컨 역시 개스가 다 빠져서 엔진룸의 더운 바람만 실내로 화악~하고 밀려들었다. 결국 T바 루프를 떼어내고 오픈 상태로 달리기로 했다. 달리다 보면 바람에 시원해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

시승차는 일본에서 들여온 모델로 스포츠카로서는 약간 어색한 자동변속기를 달고 운전대가 오른쪽에 달려 있었다. 처음 몰아보는 오른쪽 운전대라 출발할 때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조금 달리다 보니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주인 없이 떠돌던 차라는 것을 증명하듯 자동변속기의 반응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울컥대는 차를 달래듯 조금씩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주며 시승코스로 향했다. ​

교통량이 많은 국도를 천천히 달리면서 시간에 쫓겨 출발하기 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각종 장비류들을 차근차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승용차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스위치들이 스티어링 휠과 계기판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개 칼럼 스위치로 마련되어 있는 와이퍼와 헤드라이트 스위치도 계기판 양 옆에 버튼과 다이얼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에어컨 조절장치마저 계기판 왼쪽에 작게 자리잡고 있었다. 평범한 차에서 느낄 수 없는 전투적 분위기의 운전석은 이런 말을 내뱉고 있는 듯 했다. ​집중!

길게 누운 센터 페시아에는 에어 벤트 밑으로 카세트 데크와 CDP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자식 자동변속기 레버가 붙어 있다. 뒷바퀴굴림차답게 센터터널이 높아 스티어링 휠에서 약간만 손을 옮기면 바로 레버를 움직일 수 있었다. 낮은 차체로 엉덩이는 시트에 푹 파묻혔고, 긴 허리 탓에 등받이를 눕힌 필자는 결리는 목을 풀어가며 조금씩 액셀 페달에 힘을 주었다. ​

300ZX에는 자연흡기의 VG30DE와 트윈 터보의 VG30DETT의 두 가지 엔진이 얹히는데, 시승차는 그 중에서도 고성능인 트윈 터보 모델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엔진이 따끈따끈해지면 제 실력을 발휘하겠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실은 300ZX를 시승하기 얼마 전 최신형 스카이라인 GT-R(R34)을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 ‘폭발적 가속’에 온 몸을 얻어맞은 기억이 생생해서 무겁긴 하지만 더 큰 배기량의 300ZX에 대한 기대가 클 수 밖에 없었다. 곰곰 살펴보니 일본 국내용이라 시속 180km에서 연료차단이 이루어져야 정상이지만, 리미트를 해제하고 계기판을 바꾸어 250km를 넘도록 되어 있어 기대가 더욱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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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이는 못 속이는 법. 태어난 지 8년이나 지난 데다 상태마저 좋지 않아 가속은 기대했던 만큼 감동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터보에게는 쥐약인 뜨거운 날씨, 인터쿨러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높은 지면온도에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상태의 엔진은 더욱 힘을 쓰지 못했다. ​

자유로로 접어들어 속도를 더 높여보았다. 생각했던 것 만큼은 아니지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만큼 톤을 높여가는 엔진소리, 서스펜션이 든든하게 받쳐주어 스티어링 휠을 돌리는 만큼 정확하게 움직이는 차체는 높은 속도에서도 불안한 느낌 없이 차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적당히 부드러우면서도 차의 움직임을 잘 잡아내는 서스펜션 세팅은 매력적이었다. ​

점점 속도를 높여가다 보니 오픈 에어 모터링의 한계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양쪽 창문을 모두 올리고 달려야 했는데, 들어오는 바람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도리어 실내의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했다. 차 밖으로 노출된 머리 윗부분만 조금 시원할 뿐 햇빛에 더워진 실내공기 때문에 시트에 꽉 조여진 등은 땀이 줄줄 흐르는 어이없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국도로 빠져나와 몇 가지 테스트를 하면서 아쉬움 속에서도 새록새록 재미를 안겨주는 300ZX에 조금씩 감동하기 시작했다. 8년이나 된 차에 루프까지 떼어냈는데도 ‘삐걱’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든든한 섀시와 높은 조립완성도, 여전히 정확하고 섬세한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의 반응, 그리고 깔끔한 핸들링. 시승을 도와주러 나온 독자의 질문이 가슴에 와 닿았다. ’10년 가까이 된 일본차가 이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왜 이런 차가 안 나오지요?’

​차를 세우고 잠시 둘러보았다. 차체가 낮고 시트가 깊은 탓에 타고 내리기는 편하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았을 때는 몰랐는데, 내려서 뒷좌석을 보니 사람 앉을 자리는 못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2+2시터의 +2시트 그 자체였다. ​

보네트를 열어보니 엔진 좌우는 물론 위쪽으로도 빈 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빽빽한 엔진룸이 드러났다. 차체가 넓고 엔진을 세로로 얹었는데도 멀티링크 서스펜션과 V6 블록이 자리를 잡고 나니 여유공간이 별로 없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설계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음’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

사진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주변 도로를 힘껏 달려 보았다. 시원하게 코너를 파고들고 빠져나오는 그 움직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맛에 이 차를 타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토크가 모두 뒷바퀴로 몰려서 급코너를 탈출하면서 자칫 액셀러레이터를 크게 밟았다가는 쉽게 뒷바퀴에 스핀이 일어나며 차체가 휙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는 차체를 카운터로 바로잡는 것도 뒷바퀴굴림차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다. ​

물론 신통치 않은 엔진, 상태가 나쁜 앞 타이어 때문에 제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네바퀴 스티어링 장치의 일종인 HICAS도 달려 있었는데, 차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종종 경고등이 들어와 불안감을 더했다. 하지만 차의 잠재된 능력을 짐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촬영을 위한 몇 가지 연출주행을 할 무렵 출발 때부터 문제였던 엔진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시동을 껐다가 출발할 때마다 매번 점프를 해야 했고, 나중에는 달리는 도중 차가 서버리더니 급기야는 실린더 하나가 죽어버리고 불완전연소로 머플러로 시커먼 연기와 함께휘발유 혼합기를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한참 시승을 해야 할 시간에 병원에 입원시켜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승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많은 시승이었지만 스카이라인 GT-R에 이은 또 한 번의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스포츠카라고 해서 빨리 달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뚜렷한 인식, 모든 면에서 뛰어난 스포츠카를 만들겠다는 의지, 그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기술개발 등 일본차가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투자해온 노력의 일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