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월간 ‘자동차생활’ 2007년 12월호 ‘자동차 만담’에 실린 글입니다 ]
크로스오버카가 시행착오를 거쳐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매니아를 중심으로 순수한 차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크로스오버카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순수한 차의 매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퓨전, 크로스오버, 컨버전스, 하이브리드 등 융합과 혼합을 뜻하는 단어들이 온통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단어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음악과 미술 등 문화 분야부터 도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대중음악에서 팝과 재즈, 록과 클래식 등이 어우러져 색다른 분위기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점점 다른 분야로 발을 넓혀 갔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들어 IT 산업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전자제품들이 융합·통합되고, 이제는 웬만한 제품은 두세 종류의 제품 특성이 하나의 제품에 구현되어 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 1990년대 중반부터 빠르게 영역을 넓히기 시작한 이른바 크로스오버카는 이제 자동차의 장르 구분이 무의미하다 할 정도로 전방위로 퍼져나가고 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SUV와 승용차의 특징을 모두 갖췄다는 도시형 SUV들이 하나둘 등장하며 눈길을 끌었고, 대중차 메이커에서 럭셔리 메이커에 이르기까지 라인업에 빠지면 장사가 안 될 만큼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장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웬만한 메이저 자동차 메이커들은 한두 종류씩 크로스오버카를 라인업에 갖추고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부작용 불러온 크로스오버카의 대중화
자동차라는 것이 워낙 값비싼 물건이다 보니 여러 장르의 차를 모두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특징을 한 대의 차에 구현해 놓은 크로스오버카는 무척 편리하기도 하고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필자만 해도 SUV로 오프로드를 달리는 재미, 스포츠카의 빠르고 날랜 몸놀림이 주는 재미를 잘 알고 있어 두 종류의 차를 모두 갖고 싶지만 일상생활에 쓰기 편리하고 경제적인 차를 포기할 수는 없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장르별로 여러 대의 차를 사서 쓸 수 있는 형편도 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런 장르의 특징들을 고루 갖춘 크로스오버카를 한 대 갖고 싶은 생각이 있다.
크기는 준중형차 정도에 SUV만큼 키 큰 차는 필요 없기에 보디는 왜건 스타일이면 되겠고, 본격 오프로딩까지는 어려울 테니 조금 험한 비포장도로 달리기에 무리가 없는 수준의 네바퀴굴림 장치와 함께 경제성이 높은 디젤 엔진의 고출력 버전이 달려 있는 차라면 제격일 것이다. 아쉽게도 국산차 중에는 아직 이런 장르의 차가 없고, 외국 메이커의 차 중에도 이런 차는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다. 물론 국내에 수입되어 팔린다 해도 당분간은 살 여력이 없겠지만.
그러나 얼리어답터의 기질 덕분에 몇몇 장르혼합형 전자제품들을 일찌감치 사서 쓰면서 반드시 크로스오버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여러 제품을 사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제품의 특징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제품을 내놓는 메이커는 ‘1 더하기 1은 2’라는 논리로 소비자를 유혹하지만, 현실적으로 크로스오버 제품에서는 ‘1 더하기 1’이 2가 될 수 없다. 여러 제품의 기능을 하나의 제품에 몰아넣으면서 값은 모든 기기의 값을 더한 것보다는 싸지만 특정한 기기 하나보다 비싸지고, 기능은 각각의 기기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다수의 크로스오버 제품들이 갖는 태생적 한계다.
마찬가지로 크로스오버카를 표방하며 많은 차들이 나왔지만,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진짜’ 크로스오버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점점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아직까지도 크로스오버카의 대다수는 승용차 플랫폼에 SUV의 껍질을 씌운 ‘도시형 SUV’이다. 이런 차들은 대부분 승용차의 주행감각과 SUV의 다용도성을 함께 갖춘 차라고 선전되기 일쑤다.
그러나 실상 차들을 몰아보면 승용차의 안정적인 핸들링 감각은 기대하기 힘들고, SUV다운 험로주파능력이나 실내공간 활용성이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성격의 차가 되어 나왔지만 값은 승용차보다 비싸다. 물론 제품의 값은 소비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비싸진 않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차들은 실제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이 승용차와 별반 차이가 없다.
순수한 성격의 차들이 오히려 튀는 세상
크로스오버라는 개념의 특성을 살려 사람들이 쉽게 질리지 않고 차의 독특함을 즐길 수 있도록 잘 만든 차라면 보통 승용차보다 조금 비싸도 차는 팔릴 것이다. 크로스오버카가 주목받은 가장 큰 이유는 ‘튀기 때문’이었고, 개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튀는 차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중요한 장르, 가치 있는 장르로 주목받은 것이다. 그러나 몇몇 메이커들은 판단착오를 일으켰다. 크로스오버카에 대해 생각을 한 것은 좋았지만, 평범한 소비자들의 유행을 따르기로 생각하고 단순하게 접근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 메이커가 쏟아낸 차들이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승용차 바탕의 크로스오버 SUV들이다.
이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쏟아져 나온 크로스오버 SUV에 식상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메이커들은 한편으로 식상하지 않은, 신선한 크로스오버카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그 결과로 메르세데스 벤츠 CLS나 포르쉐 파나메라 같은 4도어 쿠페, 쌍용 액티언이나 BMW X6 같은 쿠페형 SUV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여러 모터쇼를 통해 선보이고 있는 컨셉트카들을 보면 그동안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SUV와 컨버터블, 대형 세단과 컨버터블의 융합을 시도하는 차들도 곧 양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들이야말로 진짜 크로스오버카라 할 수 있다.
크로스오버카가 10여 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매니아를 중심으로 뚜렷하게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 순수한 차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통합 또는 융합이 만들어낸 혼란을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귀찮은 사람들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원초적인 차로 다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어느새 주류가 되어버린 크로스오버카 덕분에 오히려 찾기 힘들어진 순수한 차들이 처음 크로스오버카가 등장했을 때처럼 튀는 차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SUV 시장이 이미 크로스오버카 천국이 됐지만 지프가 여전히 ‘가장 원초적인 SUV’인 랭글러를 포기하지 않고, 달리기 위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정통 스포츠카 캐터햄 세븐이 꾸준히 호평과 인기를 한몸에 받는 것이 그 때문이다.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 다방면에 다재다능한 멀티 플레이어가 인기를 얻기 마련이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가 역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자동차 세계를 자꾸 인간 세계와 동일시하게 되는 직업병(?)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크로스오버카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다재다능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 가지 능력에 충실한, 순수한 차의 매력은 아마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