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S 63 M1 003

[오토카 한국판 2008년 8월호에 쓴 글입니다]

기아의 중형 세단 로체가 페이스리프트되었다. 옵티마의 후속 모델로 처음 출시된 것이 지난 2005년 9월의 일이니 2년 10개월여 만의 변신이다. 페터 슈라이어 영입 후 시작된 기아의 패밀리 디자인 확립 작업이 양산차로 구체화되어 나온 첫 결실(슈라이어 합류 전에 기본 디자인이 완성된 씨드나 모하비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과는 달리 판매도 제법 잘 되는 모양이다. 역한류(?) 스타 추성훈을 앞세운 광고 캠페인의 덕도 있겠지만, 역시 차의 느낌을 확 바꾼 디자인(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덕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그간 로체의 이미지를 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기아의 마음은 페이스리프트와 함께 얻은 새 이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제 로체는 그냥 로체가 아니라 로체 ‘이노베이션(Innovation)’. 혁신, 쇄신, 일신 등을 뜻하는 말을 모델명 뒤에 붙인 것은 그만큼 변화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리라. 내용물의 변화는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아도, 디자인만큼은 ‘이노베이션’을 이루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모델명 뒤에 붙은 ‘이노베이션’이라는 이름은 별로 낯설지 않다. 이미 현대가 갤로퍼 II에 써먹었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갤로퍼 II 이노베이션. 갤로퍼의 원형인 미쓰비시 파제로가 다카르 랠리에 출전해 우승한 것을 기념해 만들었던 파제로 에볼루션(Evolution)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갤로퍼 II 숏보디 모델을 와이드 펜더와 에어댐 일체형 범퍼, 대형 루프 스포일러 등으로 치장해 내놓았던 바로 그 차 말이다. 다만 갤로퍼 II 이노베이션은 치장만 그럴싸 했던 스페셜(?) 모델을 위한 모델명이었지만, 로체 이노베이션은 새로운 디자인으로 탈바꿈한 ‘진짜’ 이노베이션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환골까지는 아니고 탈태에 충실한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그동안 썼던 모델명 뒤에 새로운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은 국내 메이커 브랜드 전략의 관례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현대는 그랜저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뉴 럭셔리, 쏘나타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트랜스폼이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르노삼성은 SM 시리즈를 페이스리프트하면서 SM3은 뉴 제너레이션, SM5는 뉴 임프레션, SM7은 뉴 아트라는 이름을 더했고, 쌍용은 페이스리프트는 아니지만 2009년형 모델을 내놓으며 모델명 앞에 수퍼(렉스턴), 리얼 SUV(카이런), it 스타일(액티언/액티언 스포츠)이라는 수식어를 더했다.

이런 것들이 기존 모델에서 뭔가 새로운 느낌을 더하고 바뀌었다는 분위기를 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델마다 겹치지 않는, 새로운 이름을 덧붙이자면 브랜드 담당자들의 고민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노베이션’이라는 썩 쓸만한 단어를 재활용(?)하기에 이르렀을 테고. 소비자들도 헷갈릴 것 같다. 특정 모델의 라이프사이클이 중간쯤에 이르면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어느 정도 변화를 준 모델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미 적지 않은 소비자들은 알고 있다. GM대우 매그너스에서 토스카로의 변화처럼 눈에 보이는 부분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페이스리프트된 모델을 새 모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페이스리프트된 2기 모델이 나왔어도 로체는 로체다. 바뀐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바뀐 것을 내세울 수 있는데 굳이 긴 덧이름을 붙여서 새로움을 강조한다는 것은 아직 모델명 자체의 브랜드 파워가 든든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모르긴 해도 로체 후속 모델은 그동안의 이미지를 고려해 새로운 모델명을 쓰지 않을까 싶다. 국산 중형차의 대명사라고 하는 쏘나타는 20년 넘도록 쏘나타인데, 동급 경쟁차들의 이름은 일일이 다 기억하기도 어려울만큼 많이도 바뀌었다. 이름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차를 자신있게 팔 수 있겠나. 훌륭한 ‘이노베이션’도 좋지만, 좀 더 진지하고 멀리 내다보는 메이커들의 네이밍 전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