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사건, 월간 ‘카 비전’ 폐간

[ 2009년 6월에 네이버 블로그에 쓴 글을 옮겨 왔습니다. ]

내가 자동차 글쓰기의 길로 들어선 지 10년이 조금 넘었다. 흔한 표현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지금의 길을 가도록 인도해 준 것은 자동차 잡지였다.

1984년,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만난 ‘자동차생활’로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91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카 비전’을 통해 또 다른, 더 넓은 자동차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적이지 않았던 시절, 일반인들이 자동차와 관련된 정통하고 깊이 있는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통로는 자동차 전문 잡지 뿐이었다.

특히 1991년 5월에 창간(7월호)한 ‘카 비전’은 당시 다른 국내 자동차 잡지들과는 뚜렷하게 다른 색깔을 갖고 있었다. 우리 사회 자동차 문화의 너비와 깊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던 시절, 해외 자동차 업계 소식과 해외 잡지와의 계약을 통해 실린 유명 해외 차종들의 시승기, 그리고 자동차 디자인과 관련된 내용들을 폭넓게 다루었던 ‘카 비전’은 진짜 ‘자동차 전문지’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멋진 잡지였다.

음악 듣고 그림 그리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었던 고등학생 시절, 몇 푼 되지 않는 용돈을 모아 매달 서점에서 ‘카 비전’을 사서 한 달 내내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탐독하는 것이 내게는 갑갑한 학교 생활 속의 몇 안되는 낙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오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지금 ‘모터트렌드’ 한국판에 글을 쓰고 계신 박규철 편집위원이 ‘카 비전’에 쓰셨던 글을 읽으며 자동차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참 매력적인 일이라 느꼈다. 아니, 박규철 편집위원의 글이 매력적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정통하면서도 감성적인 내용과 표현이 잘 버무려진 박규철 편집위원의 글은 내가 ‘나는 앞으로 자동차 컬럼니스트가 되겠다’고 마음 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꿈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것임을 확인시켜준 것은 독자가 기자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준 ‘카 비전’ 이수진 기자(이후 편집위원까지 오르셨다)였고, 잡지에서 일하며 생각하는 주제를 기사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은 ‘카 비전’ 시절의 이동희 기자(지금은 개인적으로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카 비전 키드’ 중 하나라 생각해 왔다.

1996년 기자공채 낙방 이후 몇 차례 미끄럼을 타고 나서 어렵사리 2004년 주식회사 자동차생활에 ‘자동차생활’ 취재기자로 입사했을 때, 언젠가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카 비전’에서도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물론 ‘자동차생활’을 떠날 때까지 그런 기대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2009년 6월. 앞으로 그런 기대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와지는 ‘일대 사건’이 터졌다. ‘카 비전’이 더 이상 발행되지 않게 된 것이다.

주식회사 자동차생활 내부에 있을 때 알았던, 그리고 나온 뒤 전해 들은 여러 속 사정들을 일일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참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동안 많은 이들이 ‘카 비전’의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를 써 왔다. 전문지로 분류할 수 있는 국내 자동차 잡지들 가운데 유일한 토종 브랜드로, 몇 해 전 줄줄이 창간한 ‘톱 기어’, ‘모터 트렌드’, 그리고 가장 후발주자인 ‘오토카’에 이르기까지 해외 라이선스를 얻어 만들어지는 자동차 잡지들에 맞서기 위해 그들이 기울인 노력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특히 ‘로컬 자동차 전문지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던 잡지이기에, 그리고 자동차생활 시절, 누군가 ‘누가 더 야근 많이 하고 밤 많이 새는지 경쟁하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나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몇 안되는 ‘자동차생활’ 동기 박지훈 씨가 편집장으로 분투하고 있었기에 ‘카 비전’의 폐간을 보며 유난히 가슴 찌릿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쟁에 져서 전장에서 물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모르긴 해도 배경에는 다른 복잡한 이유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카 비전’의 폐간을 보고 드는 감정이 아쉬움으로 그치지 않는 이유다.

경기가 좋아지고 소비가 살아난다고 해서 ‘카 비전’이 되살아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꼭 되살아났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나를 비롯한 자동차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지난 18년 동안 자동차에 대한 꿈과 열정, 희망을 안겨주었던 것처럼, 앞으로 자동차를 좋아하게 될 이들에게도 꿈과 열정, 희망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외국 브랜드가 아닌 토종 브랜드 자동차 잡지로서 말이다.

P.S. 지갑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분들은 지금 서점이나 인터넷 쇼핑을 통해 ‘카 비전’ 2009년 6월호를 구입해 두시기를 바란다. 당분간이든, 영원히든, 여러분이 살 수 있는 ‘카 비전’은 2009년 6월호가 마지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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