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차 매장

[ 오토카 201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내 차’를 가지고 자동차 생활을 누린 지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결코 상상하기 싫었던 상황과 별로 내키지 않으리라 상상했던 상황이 연이어 닥쳤다. 전자는 ‘소유자’란에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찍힌 자동차등록증이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후자는 아주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 중고차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 내 명의로 되어 있던 회사차를 회사에 반납했고, 당분간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면서 새 차를 살 수 있을 만큼의 자금여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집에는 아내 차가 있으니 지금 당장 내가 몰고 다닐 수 있는 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내 차일뿐 내 차는 아니다. 차를 쓸 때 계약서를 쓰고 비용을 지불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아내의 생활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기본인 아내의 차는 나에게 있어 렌터카와 거의 동격이다. 오히려 렌터카는 돈만 내면 되니 속이 편하지만, 아내 차는 탈 때마다 마음에 빚이 쌓인다(나만 이런가?). 새 차를 사거나 1년 365일 렌터카를 탈 수 있는 형편도, 마음의 빚을 키워가면서 아내 차를 빌려 탈 뻔뻔함도 없는 필자에게 ‘내 차’는 꼭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 걸맞은 대안은 중고차뿐. 이쪽저쪽 금융자산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어느 정도 금액을 만들어놓고 보니, 차라리 걸어 다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택의 폭이 좁다. 연식이나 상태를 보고 고르는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쓸 수 있는 금액 한도 내에는 마음에 드는 차종이 한 손으로 꼽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선택대상이 될 수 있는 차종들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과 시장의 황금기였던 1990년대 중후반, IMF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에 나온 차들이 대부분인데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얼마나 다양한 차종들이 시장을 수놓았던가. 한때는 경차도 자그마치 네 차종이 서로 각축전을 벌였고,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보디 스타일을 갖췄던 소형차나 크고 작은 SUV들도 개성을 뽐냈고, ‘혹시나 이번에는’ 하는 심정으로 왜건 시장의 문을 두드린 메이커들도 있었다. 이전에 없던 생소한 개념의 준대형차들도 선보이기 시작했고, 대형차도 메이커마다 개성이 두드러져 고르는 맛이 있었던 것이 그 때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처럼 풍요로운 시장의 다양한 차종들이 지금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걸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차를 보는 시선이 많이 너그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시선은 너그러워졌지만 차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높아진 듯도 하다. 최근 국내 모 메이커의 SUV를 시승하고 든 느낌도 그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데뷔 10년째를 맞이하는 그 SUV는 다른 국산 최신 SUV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장비 면에서는 많이 업그레이드되었지만, 전반적인 패키징에서 나이든 모델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장비, 꾸밈새, 성능 면에서 훨씬 열악했음에도 참 좋았던 차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말이다. 하물며 그 시절에 괜찮았던 차가 중고차 신세로 오랜 세월 풍파에 시달리면서 그 시절의 매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각의 한 가지는 사회 초년병 시절, 처음 차를 사려고 마음먹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금의 현실에 닿는다. 아무리 차를 좋아했어도 정말 필요하고,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을 모두 끌어내 활용할 수 있는 차를 고르는 순수한 냉철함이 그때에는 있었다. 지금의 딜레마를 부른, 모든 것이 변했어도 변하지 않은 ‘내 차’에 대한 환상을 깰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때의 그 순수한 냉철함이 아닐까. ‘내 차’의 빈자리를 하루라도 빨리 채우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