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월 Carmily에 기고한 글에서 발췌해 정리한 글입니다. ]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멋진 디자인, 그리고 운전을 위한 조작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주행특성.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춘 차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이 ‘무리하지 않고도 구입할 수 있는 차’ 목록에 올릴 수 있는 가격표가 붙은 차들이라면 선택의 폭은 더욱 좁아진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스포츠카라고 할 수 있는 핫 해치(hot hatch)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소형 승용차를 바탕으로 고성능을 내도록 꾸민 이런 차들은 디자인에 있어 분명 스포츠카에 견주기 힘든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성능과 매력적인 디자인을 함께 갖추고 있으면서도 비교적 대중적인 가격표를 달고 나오는 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 오랫동안 탄탄한 실력을 뽐내온 이태리 브랜드의 차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스포티한 성능으로 알피스티(alfisti)라 불리는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알파 로메오 역시 자동차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차들을 여럿 내놓았다. 그 중에서도 1954년부터 1964년까지 생산된 줄리에타(Giulietta)는 매우 독특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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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스프린트 (1954)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특히 1920년대에 유럽 각지에서 열린 모터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알파 로메오는 이태리를 대표하는 고성능 브랜드로 인지도를 쌓았다. 페라리를 설립한 엔초 페라리 역시 알파 경주차로 팀을 구성한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운영해 기반을 다졌다. 아울러 모터스포츠에서 얻은 기술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고급 승용차를 소량생산해 부유층과 유명인들을 중심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면에 있어서는 안정적이지 못했고, 특히 2차대전 중에 공장을 군용기 엔진 생산에 활용했다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 이후 회생에 나선 알파 로메오는 대중을 위한 승용차 생산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전후의 경제성장기에 들어서며 승용차 수요가 늘어난 것이 방향전환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대량생산 경험은 물론 충분한 시설도 갖추지 못한 알파 로메오에게 있어 대중을 위한 승용차 생산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52년에 전후 처음으로 승용차 시장에 내놓은 중형차 1900 역시 생산 대수는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알파 로메오는 수요가 큰 소형차 시장으로의 진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격적인 소형차로서 줄리에타의 개발에 나섰다. 줄리에타는 셰익스피어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 줄리엣의 이태리식 이름으로, 회사 이름인 알파 로메오와 어우러져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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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베를리나 (1955)

줄리에타를 위한 설계와 구성은 앞서 출시된 1900의 것을 크게 활용해 기본적인 틀은 마련되었지만, 당시 알파 로메오는 새 차의 개발비는 물론 생산설비를 갖출 수 있는 여력도 충분치 않았다. 고심 끝에 200대의 줄리에타를 내걸고 복권을 발행하는 기발한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복권 판매가 성공을 거둠으로써 줄리에타의 개발과 시설에 대한 투자는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복권 당첨자가 발표되는 시점까지 줄리에타는 채 양산되지 못했다. 시장과 소비자들은 줄리에타는 물론 알파 로메오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알파 로메오는 시간을 벌기 위해, 카로체리아 베르토네(Bertone)와 접촉해 특별 모델을 먼저 완성시켜 내놓음으로써 불안을 잠재우고자 했다.

카로체리아들은 디자인뿐 아니라 소량생산능력도 갖추고 있어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1954년 토리노 모터쇼를 코앞에 두고 베르토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토네의 디자이너 프랑코 스칼리오네(Franco Scaglione)는 줄리에타의 뼈대를 바탕으로 훌륭한 디자인의 2도어 쿠페를 만들어냈다. 가까스로 모터쇼 날짜에 맞춰 4대의 쇼카가 완성된 줄리에타는 곧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알파 로메오는 아예 이 차를 정식 라인업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줄리에타의 첫 모델인 줄리에타 스프린트(Sprint)였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4도어 세단인 줄리에타 베를리나(Berlina)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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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SZ (1960)

전통적으로 경주차의 기술을 승용차에 반영해왔던 알파 로메오답게, 당시의 일반 승용차에서 접하기 힘든 기술을 활용한 것은 줄리에타도 마찬가지였다. 블록과 헤드 전체를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1.3L 4기통 엔진에는 고성능 스포츠카에서나 볼 수 있었던 DOHC 밸브계가 쓰였고, 수동변속기에도 지금은 보편화된 싱크로메시 기구가 모든 기어 단마다 마련되어 쉽고 빠른 변속이 가능했다. 뒤 차축은 일체형인 라이브 액슬 구성이었지만 서스펜션에는 모두 코일 스프링을 썼고, 네 바퀴 모두 드럼 브레이크를 썼지만 크기를 키우고 알루미늄 드럼에 철제 냉각핀을 더해 제동성능도 뛰어났다. 이러한 기술에 힘입어, 성능과 핸들링은 당시 동급 유럽 차들 가운데 줄리에타와 견줄 수 있는 차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울러 매력적인 디자인도 줄리에타의 경쟁력을 높였다. 줄리에타 스프린트를 디자인한 프랑코 스칼리오네는 줄리에타에 앞서 공기역학적 디자인의 새 장을 연 B.A.T. 쇼 카를 디자인해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1956년에는 또 다른 카로체리아인 피닌파리나(Pininfarina)가 디자인과 생산을 맡은 2인승 컨버터블인 줄리에타 스파이더(Spider)가, 같은 해 프랑코 스칼리오네가 B.A.T. 쇼 카의 디자인을 응용해 디자인한 줄리에타 스프린트 스페치알레(Sprint Speciale, SS)가, 1959년에는 카로체리아 자가토(Zagato)가 만든 스프린트 자가토(SZ)가 더해지면서 줄리에타는 디자인과 성능에서 모두 1950년대 알파 로메오를 대표하는 걸작 승용차가 되었다. 그리고 줄리에타의 인기에 힘입어 알파 로메오는 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