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카 이야기 (2) – 브래스 시대: 소수의 장난감에서 만인의 탈것으로

[ 2011년 4월, 메르세데스-벤츠 공식 딜러 한성자동차 웹진 ‘with Hansung’에 쓴 글을 바탕으로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

벌써 한 세기 남짓한 시간이 흐른 과거지만, 브래스 시대는 현대적인 자동차의 기술적 토대가 완성된 시기다. 브래스 시대가 자동차 역사에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자동차의 소비자가 소수의 자동차 광에서 일반 대중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05년형 캐딜락 오시올라와 개발자 헨리 M. 릴랜드의 모습. 마차 형태를 벗고 상자형 차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브래스 시대(Brass era)는 파나르 시스템의 등장으로 이전의 베테랑 시대와의 경계선이 그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대개 브래스 시대는 190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브래스 시대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자동차 기술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자동차가 화려한 치장을 하게 된 데에서 비롯된다.

차체 외부로 노출되는 금속 부품에서 이런 치장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 쓰인 소재는 대부분 순금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황동이었다. 브래스(Brass)는 이 황동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황동은 라디에이터 그릴, 헤드램프 테두리, 경음기, 창틀 등에 견고하면서 화려한 느낌을 더했다. 191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황동이 니켈 도금에게, 그리고 이후로는 크롬 도금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이 시대의 자동차용 소재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한동안 고급 승용차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금 도금 부품들은 브래스 시대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07년형 로버 20HP의 라디에이터 모습. 브래스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인 황동 소재가 돋보인다

한편 영국에서는 이 시기를 에드워디언(Edwardian)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1901년부터 1910년까지 재임했던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증기기관 자동차의 속도를 제한해 자동차의 발전을 막았던 ‘적기조례’가 1896년 사문화되면서, 영국에서 자동차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현대적 자동차 기술이 자리 잡기 시작하다

1910년에 있었던 뷰익과 비행기의 속도 경쟁. 당시 비행기와 자동차의 속도는 별 차이가 없었다

초기 브래스 시대의 기술적인 흐름은 베테랑 시대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연구와 개발에 몰두하던 군소 자동차 메이커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몇몇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1천 개 이상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난립했다고 하니, 자동차 기술에서 앞서 나갔던 유럽 본토 지역을 합치면 전 세계적으로 수 천 종류의 자동차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아울러 휘발유 및 경유를 쓰는 내연기관은 지금에는 가장 보편적인 동력원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브래스 시대가 시작할 무렵까지도 증기기관이나 전기 등 다른 동력원을 사용하는 탈것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물론 대세는 점점 내연기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은 크고 무거웠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전기 모터는 배터리 기술의 한계 때문에 매력적이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휘발유 엔진은 2행정과 4행정이라는 대안도 있었을 뿐 아니라, 빠른 기술 발전으로 작고 가벼우면서 큰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자동차의 구조와 엔진에 대한 기술은 물론이고, 생산과 관련된 기술도 빠르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적 자동차 기술의 기초가 되는 여러 부품관련 기술은 거의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했다. 독일의 로버트 보쉬(Robert Bosch)는 1903년에 전기식 점화장치를, 스코틀랜드의 애롤-존스턴 카 컴퍼니(Arrol-Johnston Car Company)는 1909년에 네 바퀴 브레이크를 선보였다. 아울러 독립 서스펜션, 현대적인 개념의 변속기 등도 이 시기의 자동차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1912년의 캐딜락 광고. 전기식 시동장치를 단 ‘크랭크 없는 차’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이 당시에 등장한 기술 가운데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것들도 있었다. 1910년경에 미국의 찰스 케터링(Charles Kettering, 1876~1958)이 캐딜락을 위해 개발한 전기식 시동장치도 그런 기술 중 하나다. 당시 대부분의 엔진은 앞쪽에 ㄱ자와 ㄴ자가 연결된 모양의 크랭크를 넣어 시동이 걸릴 때까지 돌려야 했다. 그러나 충분히 힘을 주어 돌리지 못하면 반발력으로 크랭크가 역회전하면서 돌리는 사람의 팔이 부러지기도 했고, 시동이 걸리는 순간 엔진의 회전력 때문에 크랭크가 튀어나와 머리를 다치거나 심지어는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케터링의 전기식 시동장치는 이런 이유 때문에 편리함보다는 안전기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량생산을 통해 보편적 이동수단으로 탈바꿈해

1915년형 메르세데스 22/50hp 세단.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체인 구동방식을 버리고 다임러도 프로펠러 샤프트 구동방식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초기 브래스 시대만 해도 가장 앞선 자동차 기술을 자랑하던 나라는 프랑스였다. 신뢰할 수 있는 엔진을 만들어낸 것은 독일이었지만,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자동차를 위한 기술적 토대는 파나르(Rene Panhard, 1841~1908)를 비롯해 레옹 볼레(Leon Bollee, 1870~1913), 드 디옹(Jules-Albert de Dion, 1856~1946), 르노(Louis Renault, 1877~1944) 등 프랑스 기술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미슐랭이 개발한 공기주입식 타이어와 그런 와중에도 다임러와 마이바흐의 엔진 기술은 당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미국과 영국 등의 초기 자동차 개발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시대를 가장 빛낸 차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포드 모델 T였다. 1908년부터 생산된 이 차는 자동차 역사를 송두리 채 바꾼 가장 혁신적인 차로 손꼽힌다. 포드 모델 T는 저렴한 값으로 판매되어 자동차를 일반 노동자들도 구입할 수 있는 보편적 이동수단으로 만들었다. 그 밑바탕에는 표준화된 부품과 일관생산 공정을 통한 대량생산이라는 생산기술의 혁신이 있었다.

본격적인 대량생산 체제가 갖춰진 1913년의 포드 하이랜드 파크 공장 모습

모델 T가 등장하면서 부품생산에서 조립까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던 고전적 생산방식은 점차 경쟁력을 잃었다. 표준화된 부품의 대량공급은 이전까지 기대할 수 없었던 자동차의 애프터 서비스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자동차의 수명도 길어지기 시작했다. 1927년에 생산이 끝날 때까지 만들어진 모델 T는 1,500만 대가 넘어, 한때 전 세계에 굴러다니는 자동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자동차의 성격이 다양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 귀족 스포츠로서의 모터스포츠는 이 시기에 빛을 발했다. 부유층의 저택에 마차를 위해 마련되었던 공간이 점차 자동차와 고용 운전수, 그리고 정비사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어 나갔다. 아울러 유럽을 중심으로 자동차의 속도 경쟁이 새로운 볼거리와 재미거리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만들어진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영국), 부가티 타입 13(프랑스), 머서 레이스어바웃(미국) 등은 뛰어난 성능과 내구성, 빼어난 디자인을 지닌 본격적인 스포츠카의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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