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터 매거진 2014년 3월호에 쓴 글의 원본입니다 ]
자동차 회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협력과 제휴는 자동차 역사에서 흔히 접할 수 있었다. 이런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차들 가운데에는 성공한 것도 있지만 실패한 것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동차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은 차들이 적지 않다는 것. 공동개발이나 배지 바꿔 붙이기가 아니라 독특한 협력을 통해 만들어져 신선한 충격을 준 차들을 살펴본다.
란치아 테마 8.32

석유파동의 여파에서 갓 벗어난 1980년대 중반의 유럽에 고성능 럭셔리 카 수요가 늘면서 란치아는 시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색다른 시도를 했다. 중형 세단인 테마를 바탕으로 고성능 고급차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당시 피아트 계열 브랜드에는 4기통 터보 엔진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고성능 엔진이 없었다. V6 엔진이 있기는 했지만 돋보일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가져온 것이 페라리 308과 몬디알 콰트로발볼레에 사용한 V8 2.9L 엔진이었다.
이 엔진은 당시에 쓰인 다른 페라리 V8 엔진과 설계가 달라 저회전 특성이 뛰어나고 진동이 적었다. 승용차에 걸맞도록 고회전 영역을 쓰지 않도록 하면서 최고출력은 240마력에서 215마력으로 낮아졌고, 향상된 성능에 맞춰 서스펜션과 브레이크, 스티어링을 손보았다.
0-시속 100km 가속시간은 6.8초, 최고시속은 240km로 준수한 성능을 냈다.
오펠 로터스 오메가/복스홀 로터스 칼톤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GM이 로터스를 소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로터스가 가진 능력이 GM 계열 차에 접목되어 만들어진 혁신적인 차가 오펠 로터스 오메가/복스홀 로터스 칼톤이었다.
중대형 세단인 오펠 오메가/로터스 칼톤이 이 차의 바탕이었다. 직렬 6기통 3.0L 엔진을 대대적으로 손질해 배기량을 3.6L로 키우는 한편 두 개의 터보차저를 더했고, 로터스 에스프리의 점화 시스템을 이식했다. 변속기는 쉐보레 콜벳 ZR1용으로 개발한 ZF 6단 수동을 손질해 얹었고, 뒤 서스펜션을 멀티링크 타입으로 바꾸는 한편 뒤 디퍼렌셜에 대용량 LSD를 더해 접지력을 높였다.
날렵한 디자인의 에어댐과 대형 스포일러, 넓은 휠과 검은색 차체도 눈길을 끌었다. 최고출력은 382마력으로 당대 여러 스포츠카를 능가하는 수준이었고, 독일차와 달리 속도제한장치가 없어 최고속도는 시속 300km에 육박했다.
메르세데스-벤츠 500 E

럭셔리 카로는 인정받았지만 고성능 이미지는 크지 않았던 메르세데스-벤츠는 1990년대에 접어들며 BMW M5가 인기를 누리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
이에 맞설 고성능 세단을 내놓기 위해 손잡은 상대는 포르쉐였다. 당시 메르세데스-벤츠는 AMG를 자회사로 만들기 전이었고, 경영난을 겪고 있던 포르쉐는 수익을 높일 방법이 필요했다. 두 회사의 공감대 속에 새 모델의 윤곽이 그려졌다.
견고하기로 소문난 W124 E-클래스를 바탕으로 SL 클래스의 V8 5.0L 326마력 엔진과 변속기, 브레이크 등이 소재로 마련되었다. 포르쉐가 광폭 펜더를 비롯해 차체를 조립하면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으로 옮겨 차체를 칠하고, 이것을 다시 포르쉐 공장으로 옮겨 에어댐 등을 결합해 최종 조립했다.
이렇게 해서 0-시속 100km 가속 6초대의 성능을 자랑하는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완성되었고, 5년 동안 약 1만 명이 이 늑대의 주인이 되었다.
아우디 RS2 아반트

1990년대 중반 이후 아우디에 고성능 왜건 이미지를 심는 한편 RS 브랜드의 탄생을 가져온 모델이 RS2 아반트다.
당시 아우디는 콰트로와 모터스포츠로 쌓은 이미지가 좀처럼 양산차에 스며들지 않았다. 이에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특색있는 고성능 차를 만들기로 하고 아우디는 오랫동안 협력관계가 돈독했던 포르쉐와 접촉했다. 마침 포르쉐는 메르세데스-벤츠 500 E의 생산이 끝나 제작에 참여할 여력이 있었다.
기본 뼈대는 사용한 아우디 80 아반트의 것을 활용했다. 그러나 스포트 콰트로 쿠페의 혈통을 이어받은 직렬 5기통 2.2L 터보 엔진과 콰트로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튜닝해 최고출력을 315마력으로 높이고, 서스펜션 튜닝은 포르쉐의 손을 빌었다. 브레이크는 브렘보 것을 포르쉐가 손질했다. 휠과 사이드 미러는 911의 터보의 것을, 새로 디자인한 앞 범퍼에는 968의 콤비네이션 램프를 달았다.
덕분에 RS2 아반트라는 0-시속 100km 가속 4.8초, 최고시속 262km인 괴물 왜건이 탄생할 수 있었다.
복스홀 VX220/오펠 스피드스터

1990년대 중반 이후 엘란, 에스프리 등 주요 모델의 단종, GM의 철수 이후 형편이 넉넉지 않던 로터스는 엘리즈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엘리즈가 강화된 유럽 충돌안전 규제에 대응하기 어렵게 되자 외부의 도움을 찾아 나서야 했다. 이에 GM 유럽이 손을 내밀며 ‘우리가 섀시 업그레이드에 협력할 테니 그 섀시를 우리도 좀 쓰자’는 제안을 하고 로터스가 이를 승낙하면서 만들어진 차가 복스홀 VX220/오펠 스피드스터다.
첫선을 보인 것은 2000년이었다. 로버 K 시리즈 및 토요타 엔진을 쓴 엘리즈와 달리 GM이 디자인한 별도의 차체와 오펠/복스홀의 2.2L 및 2.0L 터보 에코텍 엔진을 얹었다. 여러 이유로 엘리즈보다 좀 더 무겁고 핸들링이 둔해져 스포츠성에 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원래 1만 대 한정 생산할 예정이었지만 판매는 예상을 밑돌아 7,200여 대가 생산된 후 2005년에 단종되었다.
애스턴 마틴 시그넷

럭셔리 스포츠카 업체인 애스턴 마틴이 만든 가장 독특한 차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시그넷이다. 토요타의 초소형 차인 iQ를 바탕으로 만든 시그넷은 애스턴 마틴이 강화되는 배기가스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편법이었다. 초소형차를 라인업에 추가하면 업체 평균 배기가스 배출 수치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술적인 부분은 iQ의 것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에 배지 엔지니어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애스턴 마틴 장인들이 실내를 최고급 내장재로 수제작한 것은 물론 차체 외부도 애스턴 마틴 디자인으로 다시 꾸며 차별화했다. 초기에는 기대가 컸지만 판매량은 예상을 훨씬 밑돌았다.
사실 시그넷은 iQ의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 구동계를 그대로 써 스포츠카와는 거리가 멀었다. 편의장비도 거의 그대로였다. 그러면서 애스턴 마틴과 같은 소재와 제작방식으로 실내외를 고급화했다는 이유로 iQ의 세 배 가까운 값을 치를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국 시그넷은 2년여 만에 생산이 중단되고 말았다.
알파 로메오 8C 콤페티치오네

끝 모르고 추락하는 판매와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알파 로메오는 2003년에 8C 콤페티치오네 콘셉트카를 선보였다. 전성기 알파의 매력적인 디자인과 정통 스포츠카에 어울리는 구성에 팬들은 환호했고, 그 결과 2007년부터 양산 차로 한정생산이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알파 로메오의 엠블럼과 디자인을 담고 있지만, 이 차는 여러 이탈리아 브랜드의 기술이 뒤섞여 있다. 플랫폼은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의 것을 바탕으로 길이를 줄였고, 페라리/마세라티의 V8 4.7L 엔진을 손질해 페라리가 조립했다. 최종조립은 마세라티가 맡았고, 디자인과 섀시, 브레이크 등의 튜닝은 알파 로메오가 직접 했다. 차체 패널은 탄소섬유로 만들어 바탕이 된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보다 훨씬 가벼웠고, 탁월한 제동력이 호평을 얻었다.
먼저 쿠페 500대가 한정 생산되었고, 쿠페가 생산되는 도중에 2인승 컨버터블인 스파이더의 생산이 결정되어 500대 더 한정 생산되었다.
(Cover image: Alexas_Fotos via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