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치아 스트라토스

[ 제이슨류쩜넷 오리지널 콘텐츠입니다 ]

란치아 스트라토스(Lancia Stratos)는 이탈리아 란치아가 만든 차로, 처음부터 경주를 위해 설계되어 랠리 경주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생산 중단 이후 컬트카가 되어 지금에 와서는 ‘현대적 고전’으로 높이 칭송받고 있다. 생산기간은 짧았지만, 랠리에의 영향은 대단했다.

정식 이름은 스트라토스 HF였지만 흔히 스트라토스라고 불렸다. 어떤 계기로 스트라토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성층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스트라토스페라(stratosfèra)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유래가 어떻든, 이름처럼 충격적 스타일과 성능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성격을 지닌 차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란치아가 고성능 모델에 즐겨 썼던 HF라는 표현은 고충실도 즉 무언가의 본질을 높은 수준으로 재현한다는 뜻의 영어인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의 머릿글자다. 오디오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할 표현인 하이파이(Hi-Fi)와 같은 뜻이다. 란치아는 일반 모델의 성능을 높인 특별 모델을 만들면서 모델 이름 뒤에 HF라는 별칭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스트라토스는 그렇지 않았다. 콘셉트카와 변형 모델을 제외하면, 양산된 스트라토스는 모두 HF였기 때문이다. 굳이 HF를 덧붙이지 않아도, 스트라토스는 곧 스트라토스 HF였다. 이쯤 되면 이름에서부터 쉽게 차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스트라토스 개발의 배경에는 란치아 랠리 팀 매니저 세자레 피오리오(Cesare Fiorio)가 있었다. 유럽 랠리는 1960년대 초부터 란치아가 모터스포츠에서 가장 많이 활동해 왔던 곳이고, 그는 앞바퀴굴림방식을 쓴 란치아 풀비아 경주차로 1966년부터 국제 랠리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1970년대가 가까워지면서 포르쉐와 알핀-르노 같은 다른 메이커들의 공세에 위협받기 시작했다.

란치아 스트라토스 제로 콘셉트카 (사진은 앤디 선더스 커스텀즈에서 만든 레플리카)

그러던 1970년, 이태리 카로체리아 베르토네가 토리노 모터쇼에 콘셉트카 스트라토스 제로(Stratos Zero)를 선보였다. 당시 베르토네(Bertone) 책임 디자이너였던 마르첼로 간디니(Marcello Gandini)가 디자인한 이 차는 란치아를 염두에 둔 베르토네의 디자인 제안이었고, 당시 유행하던 쐐기 형태의 디자인 안에는 란치아 풀비아의 V4 엔진이 얹혀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짧고 넓은 차체는 접지력을 최대로 살리게 설계한 것이었다.

베르토네의 아이디어와는 상관 없이, 피오리오는 비슷한 이상을 갖고 있었다. 란치아는 베르토네가 스트라토스 제로를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데 아무 관여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피오리오는 란치아가 계속해서 세계 랠리 선수권에 출전하려면, 풀비아 HF보다 훨씬 강력한 후속 차가 뒤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네바퀴굴림 구동계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탓에, 미드 엔진 구조가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스트라토스 프로토타입은 피오리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는 프로토타입을 란치아의 새로운 경주차 개발로 가시화했다. 당시까지 스포츠카들이 랠리 무대를 독점했지만, 양산 스포츠카는 일반 대중을 위한 판매에 초점을 맞춰 개발되었다. 아무도 경주에만 목적을 두고 차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랠리 규칙상 최소한 500대 이상 생산되어야 경주차로 인증받을 수 있고 국제 랠리에 출전할 수 있었다(스트라토스 개발 기간동안 500대 제한은 400대로 줄어들었다). 국제 모터스포츠를 주관하는 국제자동차연맹(FIA)는 이 숫자가 너무 많아 메이커들이 경주 목적으로 차를 생산할 생각을 하지 않게 했다고 느꼈다.

‘Lancia Stratos’의 저자 그래엄 롭슨(Graham Robson)은 피오리오의 이상도, 베르토네의 쇼카도 스트라토스 프로젝트의 진정한 실마리를 안겨주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대신 1971년 브뤼셀 모터쇼에 선보인 포드 미드엔진 GT70 랠리카를 보고 자극을 받은 란치아 책임자 피에루고 고바토(Pierugo Gobbato)가 누치오 베르토네에게 연락했다는 것이다. 결국 베르토네 스트라토스 제로가 시끄럽게 란치아 본사에 도착하면서 양산 스트라토스의 계획과 설계가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포드는 GT70을 양산하지 않았다. 포드의 문제는 인증을 위해 500대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10~20대는 낮은 값으로 어렵지 않게 수제작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몇 백만대를 만드는 것도 공장과 자금만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500대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처럼 제한된 수량을 생산하기 위해 지그와 픽스처 등 생산 설비를 마련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태리, 특히 토리노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카로체리아들은 차체와 섀시를 한정생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베르토네는 스트라토스의 차체와 섀시의 주요 제작을 맡았다. 게다가 란치아가 피아트에 흡수된 이상, 풀비아의 4기통을 대신할 엔진을 구하는 것은 어렵기는 해도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스트라토스는 처음으로 모터스포츠 인증만을 목적으로 개발한 차가 되었다.

짧고 넓은 쿠페에 가로배치 미드십 구동계를 염두에 두었던 피오리오는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주관해, 차를 대중에게 파는 데 필요한 제한조건들 없이 백지에서부터 시작했다. 여기에 두 명의 도움이 있었으니, 전직 람보르기니 선임 엔지니어 지암파올로 달라라(Giampaolo Dallara)가 먼저 참여했고 다음으로 전직 페라리 엔지니어링 책임자 마이크 파크스(Mike Parkes)가 있었다.

1971년 란치아는 베르토네에게 연락을 했고, 베르토네는 무척 기뻤다. 베르토네는 즉시(1971년 2월) 이 야수의 스타일을 맡기로 계약고 보디/섀시 일체형 구조를 생산하게 되었다. 설계는 깊은 생각의 결과에서 나온 것으로, 스트라토스는 당시의 현대적 미드엔진 차들과 달리 휠베이스가 겨우 1.93m였다. 또한, 스트라토스 개발자들은 산을 오를 때의 가속력을 좋게 하기 위해 플라스틱과 경량 합금을 차체 부품에 활용함으로써 차체의 무게를 최소화해 무게는 869kg에 불과했다. 또한 유리에는 트리플렉스(Triplex)나 세큐릿(Securit) 제품보다 가벼운 글래버벨(Glaverbel) 제품을 썼다.

내장재, 시트, 단순화된 윈도 와인딩 기어, 흡음재와 방열재도 최소화해 무게를 줄였다. 네 바퀴 독립 서스펜션, 랙 앤 피니언 스티어링, 4바퀴 디스크 브레이크는 모두 특별히 설계되었다. 그러나 약간은 어이없게도, 서스펜션, 특히 뒤쪽의 맥퍼슨 스트럿과 피아트제 스티어링 기어는 재고품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엔진이었다. 피아트/란치아 그룹에서 가능한 모든 구동계를 연구했던 피오리노는 당시 란치아의 1.6L V6 엔진과 아바르트가 만든 같은 엔진의 2L 버전을 먼저 떠올렸다. 그러나 1969년 피아트는 당시 재정적 어려움에 있던 란치아를 인수했고, 페라리의 지분 50%를 매입했다.

또한, 피아트의 새로운 자회사로 란치아를 이끌도록 선택된 사람은 이전까지 페라리 경영진에 피아트를 대표해 파견되어 있던 피에르 우고 고바토(Pierre Ugo Gobatto)였다. 그는 페라리에서 디노 246이 곧 생산이 끝나면 이미 생산된 페라리 엔진이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디노가 단종될 계획이 없었다면, 엔초 페라리는 스트라토스를 디노 246의 직접적 경쟁차로 여겨 개발을 중단시키거나 훨씬 낮은 출력의 엔진을 얹어 70년대의 전설적 랠리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우라와 에스파다를 창조했던 유명한 전직 람보르기니 기술책임자 지암파올로 달라라와 베르토네 책임 디자이너 마르첼로 간디니는 힘을 합쳐 오리지널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1971년 11월, 란치아는 스트라토스 HF 프로토타입을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했다. 스트라토스 프로토타입(섀시 1240)은 형광 적색 차체에 독특한 초승달 형상의 랩 어라운드 앞 유리를 갖춰 앞 시야는 극대화되었지만 뒤 시야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어쨌든 랠리에서는 뒤 시야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미완의 상태였고, 프로토타입은 초기 개발 기간 동안 세 개의 다른 엔진을 얹었다. 첫째는 란치아 풀비아 엔진, 둘째는 란치아 베타 엔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체 가운데 얹힌 190마력 V6 2,418cc 페라리 디노 엔진이었다.

스트라토스는 미드십 구동계를 페라리 디노 246 GT로부터 가져오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차는 없었다. 섀시와 마찬가지로, 차체 주 구조는 스틸제였다. 내부의 기계적 요소를 살피고 정비하기 위해 들어올릴 수 있도록 만든 차체 앞뒤부분은 무게가 가벼운 유리섬유가 쓰였다. 짐 공간은 구동계 위와 아래에 작은 박스 형태로 만들었지만, 스페어 휠은 앞쪽에 달렸다. 헬멧 수납공간은 실내 도어 패널 안에 모양 그대로 만들어졌다. 도어 윈도는 아래쪽으로 비스듬하게 내려갔고, 발받침은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1972년 도로주행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어 1972년 토리노 모터쇼에는 그 때까지 세 대가 만들어진 프로토타입 가운데 한 대인 페라리 V6 2.4L 12밸브 엔진과 5단 변속기가 쓰인 스트라토스가 전시되었다. 이듬해에는 차를 기술적으로 더 다듬으면서 프로토타입 클래스로 랠리에 출전해 최종 모델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피드백이 이루어졌다.

란치아는 스트라토스로 엄청난 양의 테스트를 했을 뿐 아니라 1972년부터 1973년까지 그룹5 프로토타입이 허용되었을 때 몇몇 경주에 출전하기도 했다. 1972년 가을, 산드로 무나리(Sandro Munari)와 마리오 만누치(Mario Mannucci)는 두 번째로 만들어진 스트라토스를 끌고 투르 드 코르스(Tour de Corse) 경주에 출전했다. 차는 뒤 서스펜션 파손으로 리타이어했고, 한 달 뒤 열린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랠리에서도 같은 문제로 리타이어 했다.

1973년 시작된 그룹 4 인증을 위해서는 400대가 생산되어야 했고, 차는 1974년 WRC를 위해 인증을 받았다. 디노 V6 엔진은 1974년 생산이 중단되었으나, 마지막 생산된 것 가운데 500개의 엔진이 란치아에 전달되었다. 엔진은 195마력/7,600rpm, 22.8kg∙m/4,800rpm의 성능을 냈다. 그 엔진은 페라리 버전과 달리 세 개의 카뷰레터에 더블 플로트 체임버를 달았는데, 이는 출력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랠리 주행 때 큰 원심력을 받는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차체가 워낙 낮아 차에 타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일단 운전석에 앉고 다면 페달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빼면 거의 완벽한 운전자세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느낌은 앞바퀴에 무척 가까이 있어 더 커졌다. 측면과 앞쪽 시야는 거의 완벽했지만, 뒤쪽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마무리는 고급스럽기보다 기능적이었고, 측면 유리는 부분적으로만 도어로 감춰지지만 도어 패널은 매우 두터워 헬멧도 쉽게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실내 다른 공간은 매우 비좁았다. 스트라토스는 항공기의 분위기가 났고, 일단 운전석에 앉으면 운전자는 조종사가 된 기분이었고 엔진 시동을 걸면 환상은 더 설득력이 커졌다. 엔진과 변속기 소음은 컸고, 통풍장치는 완벽한 날씨가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었다. 운전자와 동반자는 엔진 사이에 앉아, 앞쪽에 달린 라디에이터는 공간을 차지할 뿐 아니라 한 명만 타도 실내를 덥게 만들었다.

이런 단점들을 빼면 스트라토스는 완벽하게 가슴두근거리는 운전 경험이었다. 출력당 무게가 디노를 능가해 가속력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최대토크는 4,800rpm에서 나와, 3,000rpm 이상에서도 넉넉하게 토크를 발휘했다. 가속 중심의 기어비 구성 때문에 최고속도는 시속 233km에 머물렀지만 스트라토스의 달리기는 디노보다 활기찼다.

주행특성은 굽이치고 요철이 심한 산악도로에 잘 맞게 조율되었고, 매우 가볍고 더 낮은 기어의 스티어링은 짧은 휠베이스에 잘 맞았다. 무게를 무게중심에 집중시킨 것은 장점을 더욱 키웠다. 빠른 속도로 코너에 들어가면 차체는 혼연일체가 되어 효과적이고 정교하며 아주 쉽게 반응했다. 브레이크는 서보가 없었지만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매우 뛰어났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스트라토스는 경쟁자가 없다고 믿었다.

반면 직선도로나 고속 코너에서 스트라토스는 꾸준히 끌고 가기 힘든 차였다. 옆바람에 쉽게 영향을 받았고, 캐스터 액션의 부재는 운전자를 돕지 않았다. 공기역학적으로 차체를 가라앉히는 압력이 없어, 한계점에서의 핸들링은 극단적으로 예민했다. 첫 50대가 만들어진 후 란치아는 지붕과 트렁크에 스포일러를 달아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경주를 위해, 엔진은 280마력까지 출력이 높아졌고, 심지어 싱글 KKK 터보차저를 단 것은 560마력까지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터보차저 버전은 그룹 5에만 출전이 허용되었고, 자연흡기 엔진만큼 신뢰받지 못했다.

1973년 4월, 산드로 무나리는 처음으로 스페인에서 열린 파이어스톤 랠리에서 우승을 했다. 그리고 1달 뒤, 장끌로드 앙드레(Jean-Claude Andruet)와 짝을 이룬 무나리는 타르가 플로리오에서 스트라토스를 2위에 올려 놓았고, 1973년 9월에는 투르 드 프랑스 랠리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일반도로 주행용 ‘양산’ 모델이 등장하기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차체는 베르토네의 그룰리아스코(Grugliasco)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최종 조립은 가까운 란치아 공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서, 서둘러 베르토네와 란치아는 9월이 되기 전에 492대의 차를 생산했다.

1974년, 스트라토스는 짧은 시간에 많은 우승을 거두었다. 인증에 앞서 스트라토스는 프로토타입 클래스로 시실리 랠리와 타르가 플로리오에서 우승했고, 인증받는 기간 동안 산드로 무나리는 산 레모(San Remo) 랠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개발 시작때에 그룹 4 규정은 500대 생산되어야 인증이 가능했지만, 1974년 10월 1일 스트라토스는 인증을 받았고, 이미 규정은 400대 생산되어야 인증받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동안 피아트는 7대의 워크스 경주차(124 아바르트 스파이더)를 내보냈지만, 우승을 차지한 것은 무나리와 스트라토스였다. 뒤이어 지로 디탈리아 오토모빌리스티카(Giro d’Italia automobilistico), 리도 레이크(Rideau Lakes), 투르 드 코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영국 RAC 랠리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란치아는 1974년 세계 선수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75년과 1976년도 마찬가지였다.

1975년 산드로 무나리는 몬테카를로 랠리 3년 연속 우승의 첫 번째 해를 장식했다. 같은 해 비외른 발데가르(Bjorn Waldegard)는 스웨덴 랠리와 산 레모 랠리에서 우승을 했고, 사파리 랠리에서 무나리는 2위, 발데가르는 3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다시 한 번 스트라토스는 영국 RAC 랠리에 출전했는데,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발데가르의 경주는 영국 랠리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출발은 좋았지만 차는 드라이브 샤프트가 부러졌고, 미캐닉들은 수리하기 쉽도록 차체 뒤쪽을 떼어냈다. 발데가르는 이 상태로 경주를 계속해 72개 스테이지에서 40개 구간을 최고속 기록을 세웠지만, 경주가 끝난 뒤 공공 도로에서 테일램프, 방향지시등, 번호판 없이 달렸다는 이유로 실격 처리되었다.

1976년은 스트라토스가 가장 성공한 해였다. 3년 연속 세계 선수권을 안치아에게 안겨줬고, 몬테카를로 랠리에서는 1위와 2위를, 포르투갈 랠리에서는 1,2,3,4위를, 시실리와 지로 디탈리아, 코르시카 랠리에서는 1위를, 영국 랠리에서는 4위를 차지했다.

란치아 워크스 경주차만 우승한 것이 아니라, 프라이비트 팀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가장 성공적인 프라이비트 팀 중의 하나는 프랑스의 샤르도네 팀이었다. 이 팀의 스타 드라이버는 베르나르 다니시(Bernard Darniche)로, 그는 란치아 워크스팀이 스트라토스로 랠리에 출전하지 않기 시작힌 뒤에도 오랫 동안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사실 다니시는 시기에 관계 없이 가장 성공한 스트라토스 드라이버로 여겨져야 한다. 워크스 드라이버 산드로 무나리가 13회 우승을 했지만, 그가 차지한 우승은 통산 33회에 이른다.

영국에서는 그래엄 워너(Graham Warner)의 체커드 플래그(Chequered Flag) 팀을 통해 출전했고, 운전자로는 페르 잉에 발프리손(Per-Inge Walfridsson), 빌리 콜먼(Billy Coleman), 케이헐 컬리(Cahal Curley), 토니 폰드(Tony Pond), 앤디 도슨(Andy Dawson) 등이 있었다. 팀은 웨일즈 랠리에서 화재로 전소되는 등 많은 불운을 겪었지만, 앤디 도슨이 몬 차는 민텍스 데일즈 인터내셔널(Mintex Dales International) 랠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7년, 란치아 워크스팀은 피아트 팀에 합병되었고, 피아트 그룹의 마케팅 요청에 따라 스트라토스보다 피아트 131에 더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1978년까지 131은 거의 독점적으로 랠리에 출전했지만, 스트라토스는 그해 최소한 13개 주요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9년이 되면서 프라이비터 팀 만이 스트라토스로 랠리에 참여할 수 있었고, 베르나르 다니시는 샤르도네 팀으로 몬테 카를로 랠리에 출전해 스트라토스로 네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로 스트라토스가 워크스 팀으로 출전한 것은 마르쿠 알렌(Marku Alen)이 팩토리 팀을 설득해 영국 RAC 랠리에 3년 동안 매년 출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유일하다. 알렌은 RAC 랠리에서 매번 극한까지 차를 몰아붙였지만 우승은 차지하지 못했다.

1981년, 란치아는 새로운 그룹 B 랠리 수퍼카인 랠리 037을 공개했고 스트라토스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스트라토스의 국제 경주 경력의 마지막 득점은 1981년에 치러진 WRC 이벤트, 투르 드 코르세 오토모빌(Tour de Corse Automobile)에서 오랫동안 스트라토스로 출전한 개인 출전자 베르나르 다니시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라이비트 팀들은 인증이 만료된 1982년 말까지 여러 유럽 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피아트로부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엔진 출력을 제한한 새 규정에서도 경험이 풍부한 개인 팀과 우수한 드라이버와 함께라면 여전히 두려운 경쟁자였고, 몇몇 경우에는 워크스 경주차도 이길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일반도로용 ‘스트라달레(Stradale)’ 모델은 190마력의 출력으로 시속 225km까지 낼 수 있었다. 약간 답답하지만 뛰어나고 균형잡힌 핸들링 특성을 보여주어, 타이어가 닳도록 달리려면 그 전에 완벽하게 숙해져야만 하는 차와는 차원이 달랐다. 소형 미드십 엔진 페라리와 마찬가지로, 스트라토스는 마력이 있어 대다수 오너들은 차에 푹 빠졌다.

란치아에게 랠리 출전에 필요한 차는 40여 대뿐이었다. 나머지 차들은 팔리지 않은 채 유럽 전역의 전시장에 수 년 동안 전시되었고, 심지어는 판매대수가 많은 란치아 딜러들에게 부상으로 지급되기까지 했다. 세 차례 세계 랠리 선수권 우승을 했음에도 스트라토스 스트라달레의 판매는 매우 느려서, 1980년까지도 새차 상태로 팔렸다.

피아트 그룹이 피아트 131을 랠리에 투입하면서, 란치아는 서킷 내구 레이스를 위해 터보차저를 단 두 대의 그룹 5용 ‘실루엣(Silhouette)’ 스트라토스를 만들었다. 이 차들은 서킷에서 포르쉐 935에 맞서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혼합 경주에서는 성공적임을 입증했다. 투르 드 프랑스 오토모빌에서는 실패했지만, 이 차들 가운데 하나는1976년에 이탈리아판 투르 드 프랑스라 할 수 있는 지로 디탈리아 오토모빌리스티카에서 우승했다.

불행하게도 이들 가운데 하나는 젤트벡(Zeltweg)에서 과열 문제로 화재가 발생해 부서졌다. 마지막 살아남은 차는 지로 디탈리아 이벤트에서 다시 한 번 우승하고 나서 일본으로 보내져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열릴 예정이던 포뮬러 실루엣 시리즈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차는 이후 매각되어 일본 마츠다 컬렉션에 전시되었다가 유명한 스트라토스 수집가인 카 디자이너 겸 페노미넌 리미티드(Phenomenon Ltd.) 창업자 크리스찬 흐래벌랙(Christian Hrabalek)에게 팔렸다. 흐래벌랙은 1971년 팩토리 프로토타입과 1977년 사파리 랠리 경주차를 포함해 11대의 란치아 스트라토스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란치아 스트라토스 콜렉션을 갖고 있다.

스트라토스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역사 속 명차로 남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강렬한 인상은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을 낳았다. 1978년 베르토네는 스트라토스를 바탕으로 콘셉트카 시빌로(Sibilo)를 만들었고, 2005년 제네바 모터쇼에는 페노미넌 리미티드가 만든 레트로 모던 콘셉트카 스트라토스가 선보였다. 물론 현대적 재현도 좋지만, 오리지널만큼 반갑고 가치있는 것은 없다. 요즘도 유럽 곳곳의 히스토릭 랠리에서는 심심치않게 오리지널 스트라토스가 달리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 참고자료 ]

http://en.wikipedia.org/wiki/Lancia_Stratos
http://auto.howstuffworks.com/lancia-stratos-sports-cars.htm
http://www.stratossupersite.com/history.htm
http://www.stratossupersite.com/lancia-stratos-history.htm
http://www.uniquecarsandparts.com.au/car_info_lancia_stratos.htm
http://www.classicdriver.com/uk/magazine/3400.asp?id=11129
http://www.classicdriver.de/uk/magazine/3100.asp?id=11129&section=2
http://www.classicdriver.de/uk/magazine/3100.asp?id=11129&section=3
http://www.velocetoday.com/lifestyle/lifestyle_108.php
– Quentin Willson “Cool Cars”, 2001, Dorling Kindersley Limited, Lond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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