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매거진 2015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노이에 클라세의 성공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BMW는 작은 차체에 스포티한 성능을 지닌 차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활기를 얻은 BMW가 모터스포츠 노하우를 대중차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고성능 모델로 만든 것이 2002 터보다. 유럽 양산차 처음으로 터보 엔진을 얹은 2002 터보는 고성능과 과격한 디자인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석유파동 등의 영향으로 단명했다.

BMW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0년 이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블카 이세타의 판매호조와 콴트(Quandt) 가문의 투자에 힘입어 재기의 발판을 다질 수 있었고, 1962년부터 판매를 시작한 ‘노이에 클라세(Neue Klasse)’가 큰 인기를 끈 덕분에 스포티한 브랜드 이미지를 쌓으며 차츰 성장하기 시작했다.

4도어 세단인 노이에 클라세에 이어 1966년에는 같은 플랫폼의 길이를 줄여 2도어로 만든 02 시리즈가 나왔다. 02 시리즈는 첫 모델인 1602를 비롯해 작고 가벼운 차체에 스포티한 성능으로 자동차 애호가들에게 호평을 얻으며 BMW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고성능 버전인 2002는 유럽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BMW의 스포츠 이미지를 쌓았다. BMW는 이와 더불어 스포츠카 경주 출전을 위한 인증용 양산 고성능 차도 꾸준히 만들었다.

터보 엔진을 얹은 유럽 첫 양산차 

활기를 얻은 BMW는 모터스포츠 활동에 적극 뛰어들었고, 성능 향상을 위한 기술 개발에 공을 들였다. 그런 노력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차 중 하나가 1972년 파리 모터쇼에 내놓은 BMW 터보 컨셉트카였다.

1972년에 열린 뮌헨 올림픽을 기념하는 뜻으로 만들어진 이 컨셉트카는 폴 브라크(Paul Bracq)의 손에서 나온 혁신적 디자인이 돋보였다. 이 차는 나중에 주지아로 디자인의 M1과 Z1, 8 시리즈 등 여러 BMW 차에 영향을 주는 등 디자인 관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러나 기술적인 관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한동안 승용차 시장에서 거의 볼 수 없던 과급 엔진에 대한 BMW의 관심과 의도가 처음 공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과급 엔진은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여러 스포츠카와 고급차에 수퍼차저를 이용하는 과급 엔진이 널리 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중에 항공기용으로 쓰이기 시작한 터보차저도 새로운 과급 기술로 주목받으며 경주차용 엔진 등에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양산 승용차에 쓸 정도로 신뢰성을 확보한 자동차 회사는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BMW는 유럽 투어링카 선수권과 포뮬러 2에 출전한 경주차에 얹은 M12 1.4리터 터보 엔진으로 충분한 노하우를 쌓았고, 이 기술을 양산차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터보 컨셉트카로 소비자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BMW 터보 컨셉트카는 2002의 뼈대를 바탕으로 엔진을 뒤 차축 앞에 놓은 미드십 구성이었다. 그리고 2002에 쓰인 M10 2.0리터 엔진에 터보를 결합해 얹었다. 이 엔진은 개념상으로는 최고출력이 약 200마력 정도로 설정되었지만 실제로는 280마력이나 되었다. 모터스포츠 경험을 통해 M10 엔진의 잠재력을 확인한 BMW는 1973년 가을에 열린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양산 준비를 마친 2002 터보를 내놓았다. 

두 번째 페이스리프트된 02 시리즈와 함께 공개된 2002 터보는 앞서 선보인 2002tii의 2.0리터 130마력 엔진에 소형 트럭용으로 만들어진 KKK 터보차저를 달고 노킹을 막기 위해 전용 피스톤을 써 압축비를 6.9:1로 낮췄다. 쿠겔피셔(Kugelfischer)가 만든 기계식 연료분사 시스템은 2002tii의 것과 거의 같았지만 연료분사 펌프 내부 구조가 달랐다. 실린더 헤드 디자인도 바뀌었지만 밸브는 2002 tii의 것을 그대로 썼다. 덕분에 최고출력이 170마력으로 높아졌고, 1,080kg 무게의 차체는 정지 상태에서 6.9초 만에 시속 100km에 이르렀다. 최고속도는 시속 212km로 당대 쟁쟁한 스포츠카와 어깨를 나란히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포르쉐도 911 터보를 공개했지만, 엔진이 완성되지 않은 프로토타입이었다. 그래서 터보 엔진을 얹은 유럽 첫 양산차라는 타이틀은 BMW의 몫이 되었다.

앞 스트럿, 뒤 세미 트레일링 암 방식의 서스펜션에도 손질이 이루어졌다. 앞 스프링과 16mm 지름의 뒤 스태빌라이저 바는 그대로 두는 대신 앞 스태빌라이저 바 지름은 15mm에서 20mm로 굵어졌고, 뒤 서스펜션에는 새로 만든 스프링이 쓰였다. 아울러 트레일링 암, 뒤 휠 베어링, 허브 등도 강화되었다. 2002 tii보다 더 넓은 13인치 휠 안에는 더 커진 브레이크를 달았고 뒤 차축에는 차동제한 디퍼렌셜이 더해졌다. 변속기는 4단 수동을 기본으로 5단 수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

과격한 치장으로 일반 2002와 구분되어

2002 터보는 과격하게 치장한 겉모습으로 일반 2002와 구분되었다. 주행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하체가 개선되었고 광폭 타이어를 쓰면서 바퀴 주변에는 커다란 오버 펜더가 달렸다. 트렁크 끝부분에 단 스포일러와 차체를 두른 전용 데칼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과격한 치장이었다. 실내도 계기 주변에는 빨간 테두리를 둘렀고, 대시보드 가운데에는 아날로그 시계와 함께 터보차저 부스트압 계기가 추가되었다.

소형 승용차로는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했지만, 2002 터보를 둘러싼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공개된지 한 달 뒤에 터진 제4차 중동전쟁과 그에 따른 제1차 석유파동은 유럽 자동차 업계에 암흑기를 가져왔다. 교통사고 급증과 환경규제 강화로 자동차 전반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석유파동까지 닥치자 고성능 차의 입지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게다가 홍보용으로 마련된 2002 터보의 앞 에어댐에는 ‘2002 turbo’라는 글씨가 좌우가 뒤집힌 채로 쓰여 있었다. 앞서 달리는 차가 거울로 보았을 때 뒤따르는 차를 자극하려는 의도로, 차의 성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뚜렷했다. 언론은 비난을 쏟아냈다. 환경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과격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시판 모델은 스티커를 붙이지 않은 채로 출고되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나중에 따로 스티커를 구매하거나 만들어 붙였다. 

게다가 2002 터보는 터보 랙이 엄청난 것으로 악명 높았다. 회전수가 거의 4,000rpm에 이르러서야 적절한 부스트압이 생겼고, 부스트압이 충분히 생긴 뒤에는 강력한 힘을 다루기 위해 최대한 집중해서 운전해야 했다. 압축비가 낮은데다가 배기량에 맞춰 쓸 수 있는 터보차저가 제한적이어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성능은 뛰어나지만 다루기 까다로운 차로 여겨졌다. 게다가 2002 터보 값으로 살 수 있는 더 고급스럽거나 힘 좋은 대배기량 스포츠카도 있었고, 심한 연료소비는 시기적으로 결코 환영받지 못할만한 특징이었다.

결국 2002 터보는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양산 전 시험 및 기타 용도로 만들어진 12대를 포함해, 1973년 9월부터 1974년 11월까지 생산된 차는 1,672대에 그쳤다. 그러나 시대를 잘못 만났지만 전설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2002 터보로 쌓은 기술은 이후 포뮬러 1을 비롯한 모터스포츠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고, BMW의 고성능 이미지는 세계인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