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매거진 2015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재규어 E-타입으로 시작된 1960년대의 수퍼카 전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당긴 차가 페라리 250 GTO다. GT 스포츠카 시장의 강자였던 250 GT SWB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대대적으로 손질한 이 차는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어 1960년대 초반 GT 경주의 시상대를 독식했다. 아름다운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 화려한 과거 덕분에 지금은 고가에 경매되고 있다.

1961년에 재규어가 내놓은 E-타입은 유럽의 내로라하던 스포츠카 메이커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엔초 페라리조차도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아름다운 차’라고 칭송할 정도였던 예술적인 디자인은 물론이고, XK150S로부터 이어받은 직렬 6기통 3.8리터 269마력 엔진에서 비롯되는 시속 240km의 최고속도와 0→시속 100km 가속 7초 대의 성능도 당대 고성능 스포츠카로서는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일반 도로용 GT카로서는 물론 GT 경주차로서도 E-타입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재규어 E-타입 의식해 성능 높여

E-타입의 등장에 가장 위협을 크게 느낀 것은 같은 시장에서 이미 강자의 자리를 굳힌 페라리였다. 페라리는 1950년대 중반에 개발한 V12 3.0리터 엔진과 철제 튜브 용접 프레임을 활용한 250 시리즈로 스포츠카 시장은 물론 GT 경주에서도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196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E-타입의 등장을 본 페라리의 판매 책임자 지롤라모 가르디니(Girolamo Gardini)는 분명 E-타입이 당시 페라리가 경주에 투입한 대표적 스포츠카였던 250 GT SWB를 능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판단에 따라 페라리는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더 강력한 스포츠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경주용으로 한층 성능을 높인 궁극의 250 시리즈인 250 GTO가 바로 그것이었다. 모델 이름의 250은 기통당 배기량(250cc), GTO는 GT 경주 인증용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Gran Turismo Omologato) 머리글자였다.

250 GTO의 기본 설계는 이미 판매되고 있던 250 GT의 섀시에 바탕을 두었다. 조토 비차리니(Giotto Bizzarini)가 이끄는 개발 팀은 250 GT 중 휠베이스가 짧은 250 GT SWB의 섀시를 가지고 개조작업을 시작했다. 차체 개조는 구성요소의 배치와 공기역학 특성의 개선에 집중되었다. 차체 앞쪽을 낮고 날렵하게 만들기 위해 엔진은 최대한 탑승공간에 가깝게 뒤쪽으로 옮겼고, 뒤쪽은 캄(Kamm) 이론에 따라 잘라낸 듯 평평하게 처리했다. E-타입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개발이 시작되었던 섀시는 입체로 구성된 철제 튜브의 지름을 줄이는 대신 비틀림 강성을 높이기 위해 보강재를 더했다. 

엔진은 프로토타입 경주차인 250 테스타 로사(Testa Rossa)에 쓰였던 조아키노 콜롬보(Gioacchino Colombo) 설계의 V12 3.0리터 엔진을 더욱 개선했다. 이 엔진은 여느 250 GT에 쓰인 것과 달리 드라이 섬프 강제윤활방식을 써 높이가 낮았고, 그 덕분에 무게 중심을 낮출 수 있었다. 개발 팀은 이 엔진의 흡기 포트를 키우고 주요 소재를 경량화하는 한편 부품을 한층 정밀하게 만들어 높은 출력을 이끌어냈다. 이 엔진의 최고출력은 306마력에 이르러 리터당 출력이 100마력을 넘었다. 개발 작업은 1961년 내내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9월에 있었던 시험주행에서 250 GTO 시제차는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클래스 우승을 차지한 250 GT SWB을 능가하는 성능을 입증했다.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961년 10월, 페라리의 아내와 회사 핵심 인력 사이에 생긴 불화 때문에 가르디니와 기술 책임자인 카를로 치티(Carlo Chiti)를 비롯해 250 GTO 개발을 맡고 있던 비차리니 등 기술과 경주 팀 운영에 관련된 주요 인물들이 모두 엔초에 의해 해고되는 사건이 터졌다.

친위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250 GTO의 막바지 개발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기술 부분은 당시 26세였던 마우로 포르기에리(Mauro Forghieri)가 넘겨받았다. 그는 비차리니가 틀을 잡은 차체 형태를 부분적으로 손질했다. 뒤 서스펜션 강성을 높이기 위해 와트 링크를 추가하고 차체 뒤쪽 캄 테일에 스포일러를 더한 것이 가장 두드러졌다. 공기역학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페라리는 카로체리아 스칼리에티(Scaglietti)에게 도움을 청했다. 스칼리에티에서는 풍동시험을 통해 차체 형태를 다듬고 완성된 디자인의 차체를 생산했다.

1960년대 초반 GT 경주 석권한 주인공 

완성된 250 GTO는 1962년 1월에 열린 페라리의 연례 기자회견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당시 GT 스포츠카 레이스에 참가하려면 최소 100대가 생산되어야 했다. 그러나 페라리는 250 GTO를 모두 39대만 생산했다. 애스턴 마틴, 재규어 등 경쟁 회사들은 페라리의 규정 위반에 항의했다. 실제로는 경쟁 회사들의 주장이 옳았지만, 페라리는 250 GTO가 250 GT SWB의 차체만 바꾼 것이라고 주장해 인증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경주차로 만들어진만큼 실내에는 에어컨이나 오디오, 흡음재 등 편의성이나 쾌적함을 위한 장비는 거의 없었다. 일부 일반 소비자에게 팔린 차들에만 가죽 내장재가 쓰였을 뿐이다.

250 GTO는 그해 3월에 미국에서 열린 세브링 12시간 내구 레이스를 통해 자동차 경주 무대에 첫선을 보였다. 첫 출전에서 250 GTO는 클래스 우승을 차지한 것은 물론, 프로토타입 경주차인 페라리 250 테스타 로사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이어 열린 르망 레이스에서도 클래스 우승을 차지하며 페라리 330 LM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다. 함께 참가한 다른 250 GTO도 종합 3위와 6위를 차지해, 4위와 5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가장 중요한 경쟁자 재규어 E-타입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밖에도 1962년 타르가 플로리오, 1963년 뉘르부르크링 1,000km, 1964년 데이토나 2,000km 등 주요 레이스와 GT 선수권에서 250 GTO는 클래스 우승을 석권했다. 1965년에 275 GTB에게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250 GTO는 GT 경주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경매 시장에서 250 GTO는 가장 가치가 높은 차 중 하나로 거래되고 있다. 화려한 실전 기록과 함께 성능과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매력이 크고, 생산된 39대 중 36대만 남아있을 정도로 희소성이 높기 때문이다. 2014년 8월에 미국에서 열린 경매에서는 섀시번호 3851GT인 250 GTO가 3,811만 5,000달러(약 389억 1,540만 원)에 낙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