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에보(Evo) 한국판 2016년 11월호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르망 (Le Mans, 1971) | 감독: 리 H. 카친 | 주연: 스티브 맥퀸

제목이 말하듯, 영화 ‘르망’은 르망 24시간 레이스를 다룬 영화다.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화는 정해진 이야기에 레이스를 끼워 맞추지 않았다. 레이서 관점에서, 또는 레이서에 초점을 맞춰 레이스 자체를 사실적으로 풀어냈다. 가공의 인물들에 얽힌 가공의 이야기지만, 실제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고, 실제 르망 레이스를 촬영한 부분도 곳곳에 담겨 있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정도다.
무엇보다도 경주차와 레이스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실제와 실제처럼 재현한 것은 놀랍기 그지없다. 모터스포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다면 그런 구성과 재현은 나올 수 없다. 그 중심에는 주연을 맡은 배우 스티브 맥퀸의 의지와 열정이 있었다.

맥퀸은 영화계에 이름난 자동차 광이었고, 영화 ‘르망’은 포르쉐에 대한 맥퀸의 애정표현이기도 했다. 영화 초반, 맥퀸이 맡은 주인공 델라니가 몰고 르망 시가지와 일반 도로로 쓰이는 레이스 트랙을 찾는 911의 모습부터 조용히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레이스에서는 포르쉐 917과 페라리 512가 우승컵을 놓고 다투고, 델라니는 당연히 포르쉐 917을 몬다. 레이서가 주인공인 영화의 뻔한 결말들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의 팀 메이트가 우승을 차지한다. 우승을 양보하는 것도 아니고, 레이스 후반에 주어진 상황에 따라 라이벌을 견제하는 역할에 충실하다. 어쨌든 우승은 포르쉐의 차지다. 내용의 뿌리가 된 1970년 르망 레이스에서처럼 말이다.
맥퀸은 이 영화를 통해 레이서들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모터스포츠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에 나열되는 당시 현역 레이서들의 이름을 접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질 것이다. 리처드 앳우드, 데렉 벨, 위르겐 바르트, 빅 엘포드, 재키 익스, 제라르 라루스, 조 시페르트, 롤프 스토멜렌……. 모두 모터스포츠 역사에 작지 않은 흔적을 남긴 이들이다. 그들 모두 당대 르망 레이스에서 현역으로 출전했고, 일부는 영화 촬영을 위해 직접 경주차를 몰기도 했다.

광고나 홍보영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서 이처럼 포르쉐 경주차와 모터스포츠 활동이 무게감 있게 다루어진 것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지루할 정도로 진지한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제작 과정에서 제작사와 심한 마찰을 빚은 맥퀸은 그 후로 레이스에서 아예 손을 떼었다. 그 과정은 2015년에 나온 다큐멘터리 영화 ‘스티브 맥퀸: 더 맨 앤 르망(Steve McQueen: The Man & Le Mans)’가 자세히 부연한다.
맥퀸에게 ‘르망’은 인생 영화였다. 자동차, 레이서, 모터스포츠를 진지한 시선으로 밀도 있게 표현한 오직 하나뿐인 영화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점에서, 내게도 ‘르망’은 인생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