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라리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오토엔뉴스를 통해 포털사이트 다음 자동차 섹션에 제공된 글의 원본입니다. ]

페라리의 70년 역사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도전을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누군가로부터 도전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도전을 주고받으면서 페라리는 모터스포츠와 스포츠카 분야에서 탄탄하게 입지를 다지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 중 하나가 196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포드와 페라리의 대결이었다. 

시작은 헨리 포드 2세의 야심이었다. 1960년대 포드의 전권을 손에 쥐고 있던 포드 2세는 모터스포츠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국을 벗어나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려면 포드 차의 우수성을 알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터스포츠가 가장 알맞다는 생각에서였다. 쉽고 빠르게 모터스포츠에서 돋보이려면 이미 성공한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포드는 한창 모터스포츠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페라리와 접촉했다. 그러면서 1,800만 달러에 페라리 지분 90퍼센트를 인수하겠다고 제시했다. 당시 페라리 모터스포츠 팀의 1년 운영비용과 맞먹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페라리 총수인 엔초 페라리는 처음에는 포드의 제안을 나쁘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포드가 제시한 조항들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포드의 조급함과 오만함에 홀대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모터스포츠에서 자신의 역할이 크게 줄어드는 것이 싫었다. 나중에 엔초가 피아트에 페라리 지분을 넘길 때에도 엔초가 내건 조건은 분명했다. 모터스포츠 팀과 관련한 권한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고, 예산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페라리의 모터스포츠 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었고, 모터스포츠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오랜 대화에도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1963년 5월 20일 밤 열 시. 엔초 페라리는 자신의 개인비서 프랑코 고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뭐라도 좀 먹으러 나가자구.” 이내 두 사람은 회의실을 나갔고, 협상에 참여한 14명의 포드 관계자는 자리에 앉아 22일 동안 이어진 지루한 협상의 황당한 결말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미 스포츠카와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이었지만 회사로서의 페라리는 아주 작은 규모였다. 그처럼 작은 회사 총수가 세계적 자동차 기업인 포드에 콧방귀를 뀐 격이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포드 2세 역시 격노했다. 포드 2세 역시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고, 결과를 곱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협상 팀에 참여했던 임원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르망 24시간 경주에 출전해 본때를 보여줘!” 이렇게 해서 이후 몇 년 동안 이어지는 페라리에 대한 포드의 ‘복수혈전’에 불이 붙었다. 당시 르망 24시간 경주는 페라리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단 한 차례를 빼면 르망 결승선을 가장 앞서 통과한 것은 늘 페라리였다. 르망에서 페라리를 꺾는 것은 포드의 지상 과제가 되었다.

서둘러 출전을 준비하기 시작한 포드는 영국의 유명 모터스포츠 업체인 롤라와 손잡고 GT40 경주차를 만들어 당장 1964년 르망 24시간 경주에 출전했다. 그러나 경주차의 낮은 완성도와 경험 부족으로 첫 도전은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다. 1965년에는 미국 자동차 경주의 전설적 이름인 캐롤 쉘비와 손잡고 다시 도전했지만 페라리로부터 왕좌를 빼앗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2세대로 발전한 포드 GT40 마크 II가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포드 GT40 마크 II는 포드 2세의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투입된 엄청난 자금 덕에  다른 경주에 꾸준히 출전하며 충분히 숙성된 뒤였다. 그 결과 포드는 1위부터 3위까지 시상대를 석권할 수 있었다. 이후 포드의 르망 연승 행진은 1969년까지 계속되었다.

포드의 르망 우승은 포드 2세의 페라리에 대한 설욕전이었지만, 텃밭을 빼앗긴 페라리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페라리는 곧 반격에 나섰고, 포드의 본진이라 할 미국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데이토나 24시간 경주가 결전의 무대로 정해졌다. 1967년 데이토나 24시간 경주 출전을 위해 페라리는 1966년 말부터 미국에 팀을 보내, 국제 스포츠카 선수권 대회 출전을 위해 개발한 330 P4를 갈고 닦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물론 포드도 페라리의 도전을 넋 놓고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1967년 데이토나 24시간 경주는 5월 2일에 열렸다. 개별 팀이 투입한 차를 제외하면 페라리가 내보낸 330 P4 경주차는 두 대 뿐이었다. 그러나 포드는 무려 여섯 대의 GT40을 데이토나 경주에 내보내 페라리 저지에 나섰다. 포드 GT40은 새로 개발한 변속기에 문제가 있었지만, 변속기를 잔뜩 쌓아놓고 주기적으로 빠르게 교체하며 경주를 치를 정도로 엄청난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페라리의 노력과 막강한 성능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30 P4 경주차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빨리 달렸고, 선두를 달리던 두 대의 330 P4 경주차와 페라리 미국 딜러가 내보낸 412 P 경주차가 함께 달리는 장관을 연출하며 24시간의 치열한 경주를 마무리했다. 이전 해 르망에서 포드가 그랬듯, 데이토나 시상대는 모두 페라리의 몫이었다.

많은 모터스포츠 전문가가 페라리의 1967년 데이토나 24시간 레이스 우승을 모터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욕전으로 손꼽는다. 엔초 페라리는 죽을 때까지 데이토나 경주 마지막 바퀴에서 세 대의 페라리가 함께 달린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페라리 70년 역사에서 페라리와 포드 사이에 벌어진 대결은 그만큼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