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GM대우 사내보 ‘고객사랑’에 실린 글입니다]

스포츠카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스포츠카를 사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스포츠카만 전문으로 만드는 메이커들이 흔치 않고, 자동차 역사에서도 메이커들의 부침이 심한 이유다.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올곧게 ‘스포츠카 만들기’에 힘을 쏟았고, 여러 차례 어려움을 거치고도 지금까지 굳건히 버티고 있는 메이커들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스포츠카라 하면 쉽게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 있다. 독일의 스포츠카 전문 메이커 포르쉐가 그 가운데 하나다.

폭스바겐 비틀의 설계자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아들인 페리 포르쉐가 가문의 이름을 딴 자동차 메이커를 만든 것은 1948년의 일이다. 처음 포르쉐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차는 356이라는 2인승 스포츠카였다. 이 차는 개발비가 충분하지 못해 대중적 승용차인 폭스바겐 비틀의 설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당시의 유명한 스포츠카들보다 크기가 작았고 엔진의 힘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체가 가벼워 넉넉지 않은 힘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성능을 낼 수 있었고, 독일차 특유의 튼튼함과 매력적인 주행감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으며 포르쉐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P01_1024_a4
포르쉐의 첫 양산 스포츠카인 356 ©Porsche AG

356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지만,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포르쉐 사장이던 페리 포르쉐는 고민에 빠졌다. 매력이 많다고는 하지만 소비자들의 요구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에서 벗어난 자동차 메이커들은 356을 위협할 만한 스포츠카들을 속속 내놓기 시작했다. 꾸준히 잘 팔리고는 있지만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면 356보다 뛰어난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미 10년 가까이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356의 특징들은 그대로 살리고 발전시켜야 했다. 그에게는 새로운 포르쉐가 필요했다.

페리 포르쉐는 곧 결단을 내리고, 1957년에 이르러 새로운 차를 만들 것을 개발부서에 지시했다. 그가 개발부서에 전달한 의견은 단순했지만, 포르쉐 스포츠카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질을 정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믿을 수 있는 탄탄하고 빠른 달리기 실력을 갖추면서도, 일상적으로 쓰기에 불편하지 않고 스포츠카로서의 상징성과 뛰어난 품질이 한데 어우러진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얘기하면 356의 장점은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단점들은 확실하게 극복하는 것이 개발의 목표였다.

P01_0912_a4
1963년에 만들어진 포르쉐 911 ©Porsche AG

페리 포르쉐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실내공간이었다. 356은 스포츠카로서는 좋은 평을 얻었지만, 일상적으로 쓰기에는 무척 불편했다. 특히 엔진이 차체 뒤쪽에 있어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어 오너들에게서 적지 않은 불평을 들어야 했다. 값비싼 스포츠카를 구입하는 상류층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한층 세련된 성능과 함께 충분한 실내공간이 필요했다. 페리 포르쉐는 개발부서에게 간단히 이야기 했다. “새 차에 골프 클럽 한 세트는 쉽게 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 포르쉐는 직원이 1,000명 정도인 작은 회사였지만, 실력 있는 기술자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특히 차체 디자인은 페리 포르쉐의 장남인 부치 포르쉐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20대의 젊은 나이였던 부치 포르쉐는 짧은 시간동안 명차로 자리 잡은 356의 뒤를 잇는 차를 디자인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새로운 차를 만드는 데에 자부심을 갖고 동료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 그는 디자인은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스포츠카의 특징을 살린 차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부치 포르쉐가 새 차의 디자인을 위해 만든 모형을 사장인 아버지 페리에게 보여주었을 때, 페리는 새 차의 디자인이 356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지만 전체적인 조화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56을 디자인했고 당시 디자인 책임자였던 엘빈 코멘다는 부치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포르쉐 부자와 코멘다 사이의 의견충돌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페리 포르쉐가 코멘다의 의견을 무시하고 아들의 디자인을 곧바로 차체 제작회사에 넘겨줌으로써 논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코멘다 역시 뛰어난 디자이너였지만, 페리의 단호한 결정 덕분에 스포츠카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낸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

1964-Porsche_911-1
911을 디자인한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부치’ 포르쉐와 911 ©Porsche AG

한편 개발부서는 무게중심이 낮아 차체의 안정감을 높이는 수평대향 엔진과 엔진회전력이 전달되는 뒷바퀴에 무게가 실려 가속성을 좋게 해주는 뒤 엔진 뒷바퀴굴림 설계를 356에서 가져왔다. 한편 차체는 새롭게 설계해 356보다 넓고 길게 만들었다. 넉넉해진 차체 안에는 앞좌석 뒤에 간이좌석을 갖춰 급할 때는 사람을 태울 수 있으면서 평소에는 작은 짐들을 안전하게 둘 수 있게 했다. 엔진이 뒤에 있어 차체 앞쪽에 마련된 트렁크도 다른 기계요소들의 크기를 줄여 공간을 키웠다. 특히 개발 막바지에 합류한 페리 포르쉐의 외조카 페르디난트 피에히에 의해 엔진출력은 매우 높아졌다. 이때 만들어진 엔진 설계의 주요 특징들은 부치 포르쉐의 차체 디자인과 더불어 이후 30년 넘게 이어졌다.

이렇게 개발된 포르쉐의 새 차는 개발 프로젝트 이름을 차의 이름으로 쓰는 전통에 따라 901이라는 모델명을 차체 뒤에 붙이고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첫선을 보였다. 관람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확인한 포르쉐는 마무리를 거쳐 차를 내놓을 계획이었지만, 의외의 복병이 발목을 잡았다. 프랑스 자동차 메이커인 푸조가 프랑스에서 가운데 숫자 ‘0’이 들어가는 세 자리 숫자를 모델명으로 쓰는 규칙을 상표로 등록해 놓았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901이라는 이름의 차를 내놓을 수 없다고 알려온 것이다. 포르쉐가 프랑스에서 이 차를 팔려면 이름을 바꿔야 했는데, 프랑스에서만 다른 이름의 차를 내놓느니 차라리 모델명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새 차의 이름은 가운데에 ‘0’ 대신 ‘1’을 쓴 911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후로 45년 동안 포르쉐 뿐 아니라 스포츠카의 대표 모델로 사랑받은 포르쉐 911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1993-Porsche_30years_911-1
911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함께 선 부치 포르쉐(왼쪽)와 페리 포르쉐 부자 ©Porsche AG

경영자인 아버지, 디자이너인 아들, 그리고 기술자인 외조카 등 한 가문 사람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 만들어낸 포르쉐 911은 오랫동안 ‘일상적으로 쓰기 편한 믿음직한 스포츠카’라는 본질을 지킴으로써 지금까지 사랑받는 명차가 될 수 있었다. 스포츠카의 전설이 된 포르쉐 911을 디자인한 부치 포르쉐는 이후 디자인 전문회사인 포르쉐 디자인을 설립했고, 뛰어난 엔진을 개발한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이후 아우디와 폭스바겐을 거치며 경영자로 변신해 폭스바겐 그룹을 독일 최대의 자동차 회사 자리에 올려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