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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생활 2000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늦은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의도 사무실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강 둔치에 세워둔 차를 향해 걸어간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면, 저만치서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베이스만 ‘쿵쿵’거리며 가까워진다. 시선을 돌리면 형형색색의 안개등, 네온빛이 소리와 함께 다가와 우렁찬 배기음만 남기고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그 괴물의 꽁무니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엇비슷한 소리와 불빛들이 줄줄이 이어져 멀어진다. 오늘도 카폭들의 주행 아닌 비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공기를 가르는 그 묵직한 소리에 피가 끓는다. 승부욕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다. 미지의 오너와 벌이는 한판 배틀의 환상. 그러나 내게는 배틀을 위한 머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필요 이상의 겉치장은 드라이브와 아무 상관없는 것들. 튀지 않는 겉모습에서는 전혀 성능을 짐작할 수 없고 비슷한 급 차들과의 경쟁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는 뛰어난 성능을 가진 그런 머신이 내게는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가장 갖고 싶어하던 차가 바로 폭스바겐 골프 VR6이었다. 5세대로 넘어오면서 없어진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핫 해치 마니아들을 위해 폭스바겐은 VR6을 한결 세련되게 다듬고 2.8리터 V6 엔진에 풀타임 4WD 시스템까지 얹어 4모션(4motion)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내놓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갖고싶은 차의 넘버 투는 골프 4모션이다. 2년 전 BMW M 쿠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넘버 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 릴레이 시승에 마련된 골프는 4모션이 아닌 GTI지만, GTI 역시 만만치 않은 힘이 실려 있는 이니셜이다. 골프 VR6이나 코라도 G60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골프 라인업의 최고봉으로 자리잡고 있던 모델이기 때문이다. 입맛 잃은 여름날, 감칠맛 나는 드라이브를 기대하며 두터운 도어를 열고 레카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잠시 국내 시장에서 철수했다가 새로운 딜러와 함께 돌아온 폭스바겐은 간판 모델인 골프 GTI라는 방상 위에 3도어와 매뉴얼 트랜스미션이라는 입맛 당기는 반찬을 올려놓았다. 운전하는 즐거움을 위한 모델이라면 3도어는 아니더라도 매뉴얼 트랜스미션은 필수적이다. 스포츠 모델에도 오토매틱 트랜스미션을 얹은 탓에 모는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여타 수입차들과 비교하면 대단한 파격이다.

실내의 허리 아랫부분은 블랙톤으로 차분하면서도 건강한 분위기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적게, 그리고 작게 사용된 짙은 브라운톤 우드 그레인이 눈을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스타일은 물론이고 운전감각, 여러 장치들의 조작에 이르기까지 독일차 특유의 절제, 단단함, 그리고 강인함이 골고루 배어 있다. 그럼에도 곳곳에 마련된 다양한 편의장비들이 눈과 손을 즐겁게 해준다.

약간 높게 앉는 자세 덕분에 여전히 머리는 살짝 천장에 닿는다. 인슬라이딩 방식의 선루프가 달린 탓도 크겠다. 좌석 높낮이는 쉽게 조절할 수 있지만 등받이 조절은 여전히 다이얼 방식이다. 하지만 온몸을 감싸안는 레카로 시트는 한 번 맞춰 놓으면 종일 편안하다.

3도어라서 차 안팎에서 시트를 젖히기 쉽도록 등받이 양쪽에 모두 레버가 달려 있다. 접히는 방식도 타고 내리기 편리하도록 2단계로 완전히 앞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다. 물론 원상복귀 시킨 뒤에는 원래 조절해 놓았던 등받이 위치로 돌아와서 다시 조절할 필요가 없다.

해치백치고는 비교적 깊은 트렁크는 깔끔한 마무리로 제법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6:4 비율로 나뉘어 접히는 뒷시트의 가운데 부분에도 헤드레스트가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부분에 마련된 팔걸이는 폭이 제법 넓어 어린이용 좌석으로도 쓸 수 있다.

Golf GTI 1997

GTI의 엔진은 윗급인 파사트는 물론 형제차인 아우디 A3과 A4에도 얹히는 1.8리터 터보 엔진이다. 아우디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5밸브 시스템과 저압터보를 갖추고 있다. 특이한 것은 흔히 국산차에서 접했던 엔진배치와는 앞뒤가 반대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흡기 매니폴드가 앞쪽으로 나 있고, 여유공간이 충분한 뒤쪽으로 터보 로터와 배기 매니폴드가 자리잡고 있다. 흡시 필터로부터 흡기 매니폴드로 이어지는 파이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엔진룸 내부를 한 바퀴 크게 돌아 들어가는 것이다. 흡기관의 길이가 길면 응답성이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GTI는 오히려 이런 배치를 통해 지나친 민감함을 배제한 것처럼 느껴진다. 가속 때나 감속 때 액셀러레이터 반응은 부드러움 속에 정확함이 녹아 있다.

종종 찾던 와인딩 로드에는 푸른 빛 만발한 여름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한참 교통량이 많은 시간이라 제대로 달려보지는 못했지만, 끈적끈적하게 코너를 감아돌 때마다 야금야금 커지는 그 드라이빙의 즐거움은 매뉴얼 시프트가 아니면 느끼기 힘든 것이다. 3단에서 4,000rpm을 쓰나 4단에서 3,000rpm을 쓰나 차이나는 것은 속도뿐이다. 힘과 소음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매끄러운 엔진반응이 내가 몇 단으로 달리고 있는가를 순간순간 잊게 만든다.

1,750rpm부터 4,600rpm까지 고르게 이어지는 21.4kgm의 최대토크는 무딘 감각을 지닌 사람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빠르게 어깨 너머로 사라져가는 차들을 보면서 그 밋밋함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님을 실감해 보시라.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할 것 같은 평범한 차림새의 해치백이 미끄러지듯, 그러나 쏜살같이 자신의 차를 추월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경악하는 그 상대 운전자의 달걀만한 눈동자를 상상해 보시라. 그 쾌감이란… 후훗.

물론 스포츠카가 아닌 대중차로서 스포츠 드라이빙의 한계는 분명히 있다. 나의 몸무게까지 합쳐 1.3톤이 약간 넘는 무게에 150마력의 힘은 여유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서스펜션 역시 약간은 무른 듯하다. 그러나 끈적끈적한 세팅은 횡가속도에 모자람 없이 깔끔하게 버텨준다. 이만하면 드라이빙을 즐기는 데에는 알맞겠다.

적당한 힘으로 운전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GTI만큼 4모션 모델이 기대된다. 큰 엔진의 큰 출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섀시가 가져야할 조건들이 더욱 많아진다. 때문에 골프에 내재된 잠재력은 보통 생각하는 대중차 이상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잠재력과 포용력을 갖춰야 한다.

차에서 내려 가만히 차를 둘러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뚱뚱해지는 탓에 초대 모델의 아담함(오죽하면 미국 시장에 ‘토끼(Rabbit)’라는 이름으로 팔았겠는가!)은 찾아보기 어렵다. 차체 밖으로 터져나올 듯 자리잡고 있는 피렐리 P6000 타이어가 끼워진 16인치 휠 덕분에 차의 모습은 튼튼한 운동화를 연상케 했다. 운동화… 어쩌면 GTI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대변할 수 있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