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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 비전 2003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아마도 1991년이었던 것 같다. 정보화 바람에 휩쓸려 아버지께서 집안에 새 컴퓨터를 들여놓으신 것은. 그간 게임기에 가까운 8비트 컴퓨터에 익숙해져 있던 필자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혁신적인 32비트 컴퓨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웠던 것은 컴퓨터 키보드 옆에 놓인 흰색 플라스틱 덩어리(마우스)와 한글 윈도우 3.1 운영체제였다. 명령어를 쳐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한번에 하나의 프로그램 밖에는 쓸 수 없었던 도스(DOS)를 갓 접했던 필자에게, 난데없이 눈앞에 펼쳐진 윈도우의 세계는 신기함과 함께 어렵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좀더 편하고 손쉽게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긴 했지만, 그것이 쉽다는 것을 깨닫고 적응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만만치 않았다.

i-드라이브, 뒷좌석 와서 제자리 잡아

성능이 점점 상향평준화 되고 있는 요즘에 있어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바로 사람과 차 사이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문제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에 시승한 BMW 760Li는 차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 특징들에 앞서 i-드라이브(i-Drive)라는 인터페이스에 관심이 모아졌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왜 새삼스럽게 꺼내느냐고? 760Li에서는 i-드라이브 컨트롤러를 손에 쥐는 것이 운전자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i-드라이브는 나날이 늘어가는 편의장비를 다스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시스템이다. 운전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장비들을 한데 몰아놓고, 단순한 몇 번의 손놀림으로 그 많은 기능들을 손쉽게 찾고 작동시킬 수 있게 한다는 아이디어는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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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과 관련된 모든 장치들은 스티어링 휠 주변에 몰려 있어 그저 손가락들만 움직이면 된다. 레버의 수만 해도 모두 4개. 6단 자동 변속기의 모드 전환 레버마저도 오른손 근처로 옮겨왔고, 수동변속 스위치는 스티어링 휠에 자리잡고 있다. 나머지 장비들은 센터콘솔의 컨트롤 센터와 센터페시아 주변에 몰려 있다. ‘드라이빙 존’과 ‘컴포트 존’의 완벽한 구분이 i-드라이브 시스템의 핵심이다.

i-드라이브는 전후좌우와 대각선의 8방향으로 밀고 당김으로써 주 기능을 선택하고, 다이얼처럼 돌려서 메뉴를 이동하고 컨트롤러를 누름으로써 설정하는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기능을 다룰 수 있게 되어 있다. 문제는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기능선택 메뉴의 시인성과 직관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운전에 집중해야 할 운전자가 한눈에 파악하고 기능을 조절하기에는 분명 부담스러운 장비다. 그렇기에 뒷좌석에 마련된 i-드라이브 컨트롤러는 오히려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진정한 고급차는 운전사와 오너의 역할과 위치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차라는 점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고전적인 인터페이스를 고수하고 있는 벤츠나 MMI라는 통합 인터페이스를 시도하고 있는 아우디와 심각하게 비교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i-드라이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 듯하다. 시승 시간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보내야 했던 탓이다. 사실 i-드라이브를 제쳐놓고 보면, 운전자 입장에서 760Li는 입에 침이 마르게 하는 차다. 80여 년에 걸친 BMW의 자동차 만들기에서 정점에 위치한다는 무형의 의미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BMW 역사상 가장 큰 엔진인 V12 6.0리터 엔진과 섀시에 얹힌 다양한 첨단기술들은, 이 차의 크기를 잊은 채로 ‘스포츠 세단을 몰고 있다’는 기분에 물씬 젖게 한다.

6.0리터급 대 배기량 엔진의 경험은 독일에서 시승했던 폭스바겐 페이튼에 이어 두 번째다. 사실 두 엔진, 그리고 두 차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뿐 아니라 비교하고 싶지도 않다. 이미 두 차는 상식적인 차원의 고급스러움을 넘어섰다. W12와 V12라는 형식상의 차이, 앞바퀴 중심의 4WD와 뒷바퀴굴림이라는 구동방식의 차이는 제쳐놓더라도 여러 면에서 부족할 것 없는 완벽에 가까운 차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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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비교대상이라 할 메르체데스 벤츠 S600 역시 V12 엔진을 얹고 있는데, 배기량은 760Li에 약간 못 미치는 5.5리터 다. 배기량이 큰데도 출력이 더 낮은 이유는 S600이 터보를 얹은 탓도 있지만, 760Li의 N73 엔진이 직분사 방식을 쓰기 때문이다. 대 배기량 엔진의 가장 큰 문제점인 배기가스로 인한 공해문제 해결을 위해, BMW는 일반적인 방식 대신 독자기술을 개발해 얹었다. 그럼에도 고유의 감각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것은 더블 바노스(VANOS)와 밸브트로닉 전자식 밸브제어장치가 익을 만큼 익었기 때문이 아닐지. 가속할 때 발끝에 와 닿는 정교한 진동의 점점 치밀해지는 느낌과, 배기관을 꽉 채운 듯 빈틈없는 배기음의 또렷한 상승감은 다른 어떤 차에서도 맛볼 수 없다.

가속력에 있어서는 달리 말이 필요 없다. 정지상태부터 전력질주하는 느낌도 놀랍지만, 시속 80km에서 가속하든 120km에서 가속하든 상관없이 등 전체로 느껴지는 압박감은 2톤이 넘는 차의 덩치를 잊게 한다. 구형의 신뢰감 넘치는 몸놀림은 몸집이 훨씬 불어난 신형에서도 여전하다. 힘의 여유가 의도하는 바는 스포츠성이 아니건만, 운전자의 의지에 따라 같은 차로 안락함과 긴장감을 함께 맛볼 수 있다. 넉넉한 힘의 여유는 정속주행 때 더욱 돋보인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와중에도 기어는 5단, 엔진회전수는 2천rpm에 머물러 있다. 기어를 6단으로 올리면 엔진은 1천500rpm 안팎에서 잔잔하게 움직인다.

고속순항에 알맞은 최상의 안락감

한적한 국도의 굽은 길에서 느껴지는 약한 오버스티어는 덩치 큰 V12 엔진을 얹느라 앞이 무거워진 때문. 이런 특성이 서스펜션의 소프트한 세팅과 맞물려 가슴을 살짝 들뜨게 하지만 운전자의 의도에 따라 전자제어 주행안정장치가 주행 라인을 바로잡으려 애를 쓴다. 큰 키 탓인지 차체의 롤이 약간 거슬리긴 해도 뒷좌석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정교한 전자장비 덕분에 스티어링 휠을 돌리고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에만 신경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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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전통의 전투적 분위기를 풍기는 운전석과 달리 뒷좌석은 럭셔리 세단의 기본기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 특히 뒷좌석은 2명까지만 타야 기능을 100% 활용할 수 있다. 좌석의 각도나 히터 온도조절은 물론이고, i-드라이브 컨트롤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접이식 팔걸이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급을 타는 사람이라면 여러 편의장비쯤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적당한 탄력과 단단함을 갖춘 시트는 다분히 장거리 고속순항을 염두에 둔 것이다. 굴곡과 재질감은 여유와 긴장감을 골고루 갖추고 있고, 쿠션도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적절히 버무려져 있다. 하지만 앞좌석 사이에 놓인 모니터는 왠지 ‘구색 맞추기’용으로 보인다. 트렁크에 놓인 DVD 체인저를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인디비주얼 모델의 고급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더해야 할 듯하다.

트렁크는 버튼으로 열리고 닫히는 완전자동 도어를 지녔다. 한 손에 짐을 들고도 손쉽게 물건을 넣고 뺄 수 있다. 트렁크 도어가 열리는 모습을 보면 차 뒤쪽의 독특한 스타일이 기능성을 고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골프백 4개 정도는 넉넉히 들어가는 공간이지만 냉장고 때문에 여유가 줄어 아쉽다. 철판이 그대로 노출된 뒷창 아래의 선반 밑 부분도 조금은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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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760Li를 타며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보기에 무척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선물이지만 너무 꼼꼼하고 기술적으로 포장되어 있어 포장지를 벗기기가 조금 번거롭다는 점, 그리고 그 포장지를 벗겨내면 생각했던 것만큼 알차고 뿌듯한 선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핸드폰 문자 메시지 받고 보내기마저 곤란해하는 연령대 고객들이 주로 구입할 만한 차임에도 컴퓨터 세대가 아니면 난감해 할 인터페이스를 가진 신형 7시리즈가 국내에서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차만 놓고 본다면, 인터페이스가 어렵지 않거나 구매층의 나이가 그리 높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논점을 하드웨어 외적인 쪽으로 옮겨야 하고.

사실 이 정도의 럭셔리 세단을 구입하는 것은 단순한 수치 비교나 성능 차이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보수적인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760Li는 여러모로 깨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차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는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끄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그 ‘뭔가 다른 생각’이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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